조각가의 눈으로 본 미국 원주민 참전용사 기념관
팬데믹으로 우리가 모든 활동을 자제하고 있던 지난 2020년 11월 11일, 국립 미국 원주민 참전용사 기념관 (National Native American Veterans Memorial)이 워싱턴 디시에 건립되었다. 디시에서 가장 최근 건립된 이 기념관은 국립 아메리카 인디언 박물관 (National Museum of the American Indian)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방문한 그곳은 나무로 둘러싸이고 작은 연못을 끼고 위치하여 번잡한 도시에서 한적한 휴식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별히 미국에서 인종 간의 갈등의 여러 사회문제가 요란하게 대두되고 있는 이때, 이 조용한 기념관은 미국인이라는 의미를 잠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공간이 나에게 되기도 하였다.
나는 종종 미국의 다양성에 관한 나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나 자신이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자임으로부터 출발하여, 수많은 이민자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화합을 원하는 나의 고귀한(?) 희망을 반영하고 있었기에 이를 말함에 주저함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오늘 나는 나의 미국에 대한 이해의 치명적 오류를 발견하였다. “미국은 미국 원주민과 이민자의 나라이다.”로 내 생각을 다시 전환하고, 조용하지만 누구보다도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미국의 원주인을 기념하는 이 기념관을 존경의 마음을 담아 둘러본다.
국립 미국 원주민 참전용사 기념관은 미국 원주민 참전용사를 기념하고 그들의 가족의 희생을 인식하고 기념관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축복받고 치유되는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념관은 2018년 국제공모에서 당선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하비 프렛( Harvey Pratt)의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다. 하비 프렛은 미군 해병으로 그 자신이 베트남전 참전 용사이고 미국 원주민으로 오클라호마의 샤이엔과 아라파호 부족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는 기념관이 설립된 위치를 찾던 중 한 마리의 매가 갑자기 공중에 나타나 기념관의 부지가 될 장소에 위치한 나무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고 이야기하고 그것을 범상치 않은 징조로 보고 조상의 계시로 받아들여 장소를 선택하였다고 한다. ( 그의 증조할아버지의 인디언 이름은 “빨간 꼬리 매( Red Tail Hawk)” 로 그는 매의 등장은 조상들이 이 프로젝트를 축복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장소 선정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 기념관은 미국 원주민들의 토속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디자인되었다. 나무와 물로 둘러싸여 있는 기념관은 그 입구에서 “생명의 길( Path of life)”이라는 구불한 좁은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데 물가쪽으로 위치한 녹슨듯한 난간이 인상적이다. 건립이 일 년이 채 안 된 기념관임을 고려할때 난간의 모습은 의도적으로 산화되고 있는 금속을 통하여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게 한다. 기념관의 중심은 돌로 만들어진 원통형의 북( Drum) 위에 12피트의 스텐레스 원형의 구조물이 직각으로 설치되어 있다. 원통형의 석재 북의 둘레에는 물결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중앙으로부터 물이 나와서 넘쳐흐르며 순환되게 되어 있다. 그 위에 있는 커다란 원형의 구조물의 안쪽 아래는 특별한 행사 때 불이 지펴져 나오는 구조이다. 이 원형에 대하여 프렛은 이 모양은 달, 태양과 같은 자연을 상징하고 생명과 계절의 순환을 상징한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이 원형의 빈공간은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라고도 이야기하는데 물, 불, 대지, 공기와 같은 자연의 요소들이 모두 그의 디자인에 녹아 있다.
이 수직 원형의 구조를 둘러싸고 또 다른 원형의 공간이 있다. 돌로 만들어진 둘러싸진 벽이 그것인데 이 안쪽은 앉을 수 있는 의자의 형태이고 바깥쪽에는 구조물을 돌며 걸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이 벽의 네 방향에는 커다란 창과 같은 막대기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기도의 봉 (Prayer Pole)으로 그 끝은 깃털의 모양으로 주조되어 장식되어 있고 각기 흰색,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의 천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기도의 봉은 방문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데 방문자는 기도를 긴 천에 적어 각 기도의 봉에 매달고 원주민들은 이 기도의 끈이 바람을 통해 날리며 그 소원이 하늘에 전달된다고 믿는다. 또한 기념물 구조를 감싸고 있는 나무의 숲에서는 원주민 여러 부족의 녹음된 노래가 연주되는데 이 소리는 마치 주문을 반복하여 외우는 듯하여 제사와 같은 의식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상당히 영적인 체험이 가능한 이 공간은 마치 한국의 무속신앙이 담긴 장소인 서낭당이나 솟대 그리고 굿과 같은 의식을 연상케 한다. 동네입구에 커다란 나무에 길흉과 명복을 기원하며 색색이 달린 오색의 끈과 하늘과 이 세상을 잇는 매개체로써 오리와 같은 새의 형상을 긴 막대기 끝에 장식한 솟대와도 모양과 역할에 있어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거창한 전통적인 해석 이외에도 이 기념관의 모습은 우리에게 단순히 자연 속에 캠핑하며 작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에 옹기종기 돌아앉아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함께 나누는 온기속에서 우리 모두는 그간의 피로를 녹이고 서로 가까워지며 회복하지 않았던가? ‘나는 꿈꾸는 자’라고 이야기하는 아티스트 프렛은 ‘우리는 모두 다르나 또 같다’고 이야기한다. 오늘 나는 여기서 원주민들과 함께 꿈꾸는 자가 되어, 세상의 이런저런 작은 전쟁에서 상처받은 각기 다른 우리가 이 회복의 공간에서 잠시의 휴식을 취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우리의 바램을 하늘로 날리는 것을 꿈꿔 본다.
팬데믹으로 우리가 모든 활동을 자제하고 있던 지난 2020년 11월 11일, 국립 미국 원주민 참전용사 기념관 (National Native American Veterans Memorial)이 워싱턴 디시에 건립되었다. 디시에서 가장 최근 건립된 이 기념관은 국립 아메리카 인디언 박물관 (National Museum of the American Indian)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방문한 그곳은 나무로 둘러싸이고 작은 연못을 끼고 위치하여 번잡한 도시에서 한적한 휴식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별히 미국에서 인종 간의 갈등의 여러 사회문제가 요란하게 대두되고 있는 이때, 이 조용한 기념관은 미국인이라는 의미를 잠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공간이 나에게 되기도 하였다.
나는 종종 미국의 다양성에 관한 나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나 자신이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자임으로부터 출발하여, 수많은 이민자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화합을 원하는 나의 고귀한(?) 희망을 반영하고 있었기에 이를 말함에 주저함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오늘 나는 나의 미국에 대한 이해의 치명적 오류를 발견하였다. “미국은 미국 원주민과 이민자의 나라이다.”로 내 생각을 다시 전환하고, 조용하지만 누구보다도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미국의 원주인을 기념하는 이 기념관을 존경의 마음을 담아 둘러본다.
국립 미국 원주민 참전용사 기념관은 미국 원주민 참전용사를 기념하고 그들의 가족의 희생을 인식하고 기념관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축복받고 치유되는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념관은 2018년 국제공모에서 당선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하비 프렛( Harvey Pratt)의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다. 하비 프렛은 미군 해병으로 그 자신이 베트남전 참전 용사이고 미국 원주민으로 오클라호마의 샤이엔과 아라파호 부족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는 기념관이 설립된 위치를 찾던 중 한 마리의 매가 갑자기 공중에 나타나 기념관의 부지가 될 장소에 위치한 나무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고 이야기하고 그것을 범상치 않은 징조로 보고 조상의 계시로 받아들여 장소를 선택하였다고 한다. ( 그의 증조할아버지의 인디언 이름은 “빨간 꼬리 매( Red Tail Hawk)” 로 그는 매의 등장은 조상들이 이 프로젝트를 축복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장소 선정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 기념관은 미국 원주민들의 토속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디자인되었다. 나무와 물로 둘러싸여 있는 기념관은 그 입구에서 “생명의 길( Path of life)”이라는 구불한 좁은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데 물가쪽으로 위치한 녹슨듯한 난간이 인상적이다. 건립이 일 년이 채 안 된 기념관임을 고려할때 난간의 모습은 의도적으로 산화되고 있는 금속을 통하여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게 한다. 기념관의 중심은 돌로 만들어진 원통형의 북( Drum) 위에 12피트의 스텐레스 원형의 구조물이 직각으로 설치되어 있다. 원통형의 석재 북의 둘레에는 물결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중앙으로부터 물이 나와서 넘쳐흐르며 순환되게 되어 있다. 그 위에 있는 커다란 원형의 구조물의 안쪽 아래는 특별한 행사 때 불이 지펴져 나오는 구조이다. 이 원형에 대하여 프렛은 이 모양은 달, 태양과 같은 자연을 상징하고 생명과 계절의 순환을 상징한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이 원형의 빈공간은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라고도 이야기하는데 물, 불, 대지, 공기와 같은 자연의 요소들이 모두 그의 디자인에 녹아 있다.
이 수직 원형의 구조를 둘러싸고 또 다른 원형의 공간이 있다. 돌로 만들어진 둘러싸진 벽이 그것인데 이 안쪽은 앉을 수 있는 의자의 형태이고 바깥쪽에는 구조물을 돌며 걸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이 벽의 네 방향에는 커다란 창과 같은 막대기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기도의 봉 (Prayer Pole)으로 그 끝은 깃털의 모양으로 주조되어 장식되어 있고 각기 흰색,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의 천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기도의 봉은 방문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데 방문자는 기도를 긴 천에 적어 각 기도의 봉에 매달고 원주민들은 이 기도의 끈이 바람을 통해 날리며 그 소원이 하늘에 전달된다고 믿는다. 또한 기념물 구조를 감싸고 있는 나무의 숲에서는 원주민 여러 부족의 녹음된 노래가 연주되는데 이 소리는 마치 주문을 반복하여 외우는 듯하여 제사와 같은 의식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상당히 영적인 체험이 가능한 이 공간은 마치 한국의 무속신앙이 담긴 장소인 서낭당이나 솟대 그리고 굿과 같은 의식을 연상케 한다. 동네입구에 커다란 나무에 길흉과 명복을 기원하며 색색이 달린 오색의 끈과 하늘과 이 세상을 잇는 매개체로써 오리와 같은 새의 형상을 긴 막대기 끝에 장식한 솟대와도 모양과 역할에 있어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거창한 전통적인 해석 이외에도 이 기념관의 모습은 우리에게 단순히 자연 속에 캠핑하며 작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에 옹기종기 돌아앉아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함께 나누는 온기속에서 우리 모두는 그간의 피로를 녹이고 서로 가까워지며 회복하지 않았던가? ‘나는 꿈꾸는 자’라고 이야기하는 아티스트 프렛은 ‘우리는 모두 다르나 또 같다’고 이야기한다. 오늘 나는 여기서 원주민들과 함께 꿈꾸는 자가 되어, 세상의 이런저런 작은 전쟁에서 상처받은 각기 다른 우리가 이 회복의 공간에서 잠시의 휴식을 취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우리의 바램을 하늘로 날리는 것을 꿈꿔 본다.
조각가의 눈으로 본 사라진 기념비 조각들
키힌데 와일리 (Kehinde Wiley)의 새로운 기념비적 조각 “전쟁의 루머 (Rumors of war)”를 직접 보기 위해 방문한 버지니아의 리치먼드에서 나는 깜짝 놀라는 경험을 하였다. 차를 세울 수도 없는 교차로 중앙에 좌대만이 덩그러니 남은 기념비를 운전 중 만난 것이다. 그것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연합의 장군이었던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기념비의 일부였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흑인 인권운동의 여파로 이에 반하는 많은 기념비적 조각들이 그 자리에서 철거되었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인권 유린의 사건으로 성난 군중에 의해 특정 기념비적 조각은 훼손되고 끌려 내려오는 순간을 담은 많은 뉴스 보도를 보았기에 사실 좌대만이 남은 기념비를 본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이러한 실물을 대하는 것은 꽤 충격적이고 조금 과장을 한다면 알 수 없는 전율(?)이 이는 일이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 느낌은 마치 갤러리 저 구석에 샘이란 제목으로 의도적으로 거꾸로 놓인 뒤샹의 변기를 만난 관람객이 느꼈을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을까?
토마스 조나단 잭슨( Thomas Jonathon Jackson)은 1861년 7월 남북전쟁 당시 리치먼드까지 진격한 북부연합의 공격에 맞서 승리한 후 ‘돌로 만든 벽 (Stonewall)’ 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는 남부연합의 용장이다. 그의 기념비는 1919년 화강암 좌대 위에 말을 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브론즈로 제작하였는데 로버트 리, 제임스 이웰 브라운 스튜어트, 제퍼슨 데이비스 등의 다른 남부연합 영웅들의 기념비가 있는 모뉴먼트 에비뉴에 세워진다. 2020년 인종차별 시위가 확산하면서 그의 조각은 시에 의해 해체되고 철거되는데 현재 그곳에는 스톤월 잭슨을 떠받치고 있던 좌대만이 남아있다.
조각가로 난 이 남겨진 좌대에 주목하고 싶다. 현대 조각의 역사에서 조각은 더이상 좌대위에 위치하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오기도 하며 좌대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조각이 되는 사고의 전환이 있었다. 우리는 일상의 레디메이드 오브제인 변기가 뒤집어져 갤러리에 “샘(Fountain)”이란 제목으로 전시됨으로 더럽고 일상적인 도구에서 귀하고 주인공이되는 예술로 전복되는 가치의 전환을 만들며 현대미술의 큰 전환점이 된 뒤샹의 작업을 알고 있다. 스톤월 잭슨 기념비의 좌대가 이러한 뒤샹의 샘 작업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것이 최근 기념비적 조각의 철거에 관한 찬반 논쟁의 하나의 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역사 속 수많은 인물을 다시 한번 ‘정의, 자유, 인권’ 등의 잣대로 평가한 후 그들의 역사적 위치를 재고해 봐야 한다는데는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기념비적 조각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가치 기준의 문제를 담고 있는 부분이기에 계속되는 화두가 되고 있고 이에 대한 변화의 요구가 계속되는 것이다. 이중 특정 기념비적 조각의 철거 문제가 대두되며 찬반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철거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며 교훈으로 삼는 도구로 유지할 것인가? 수많은 프로테스터들의 폭력적인 기념비 조각 훼손 영상을 본 나는 처음에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역사의 교훈이 되는 한 부분으로 남겨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한 흑인 여성의 울부짖는 인터뷰를 보며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녀는 노예제를 옹호한 인종차별주의자의 기념비 아래를 매일 지나는 것이 얼마나 그녀와 가족에게 가슴 아픈일인 것인지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예를 들어 그들의 입장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에게 저 기념비는 유대인 커뮤니티에 나치의 심볼을 세워놓는 것과 같다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고통받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이 기념물들이 역사의 교훈이 되는 부분으로 남겨야 한다면 누구에게 교훈이 된다는 것인가? 여기서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은 그 피해와 희생의 그룹이 아니었을까? 나는 여전히 삼자였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옳지 않은 과거를 담은 기념비적 조각들은 철거되어야 한다. 그것이 조형 언어의 문제이건(예를 들자면, 워싱턴 디시 해방 기념관에 링컨 대통령 기념 조각, 뉴욕 자연사 박물관앞의 T.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마 조각 등), 인물 자체의 문제이건간에 이러한 기념 조각은 더는 역사 속 공공 기념물로서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치워지고 지워지는 것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부분의 답을 여전히 찾고 있지만, 버지니아의 리치먼드에서 적어도 두 개의 답을 찾은 것 같다. 그 하나는 새로운 역사에 맞는 새로운 기념물 조각을 만드는 것이다. 키힌데 와일리 (Kehinde Wiley) 의 “전쟁의 루머 (Rumors of war)”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치워진 역사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스톤월 잭슨의 남겨진 좌대는 이제는 더이상 보조적 역할이 아닌 지난 프로테스터들의 스프레이 페인트로 남긴 역사의 흔적을 옅게 몸에 지닌 채 (뒤샹의 소변기의 작가의 사인과 같이 ) 그 자체로 기념비 조각이 되었고 그 위의 비워진 공간은 그 어떤 새로운 조형물보다 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국의 비영리 단체로서 인권 문제의 피해자들을 위한 법률적 지원을 하는 남부 빈곤 법률센터 (Southern Poverty Law Center)는 통계자료에서 2020년 5월 25일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지금까지 미 전역에 걸쳐 인종차별과 인권유린 문제와 관련된 공공기념물이 100개 이상이 제거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공공기념물은 정부 건물, 기념비 및 동상, 명판, 학교, 공원, 카운티, 도시, 군사 자산, 거리 및 고속도로 등 생각보다 광범위한데 기념비와 기념 조각이 물론 많은 수를 차지한다. 오늘 방문한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모뉴먼트 에비뉴에도 지난 글에서 언급한 제임스 이웰 브라운 스튜어트, 윗글의 스토월 잭슨의 인물상을 포함하여 남부연합군의 대통령을 지낸 제퍼슨 데이비스와 유명한 해양학자이자 남부연합의 또 다른 영웅이었던 매튜 폰테인 머리 등의 인물상이 2020년 철거되었다. 그들은 사라졌으나 비워진 흔적을 담은 남겨진 기념물들은 역사의 평가를 담은 새로운 기념 조각이 되어 각각의 위치에서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키힌데 와일리 (Kehinde Wiley)의 새로운 기념비적 조각 “전쟁의 루머 (Rumors of war)”를 직접 보기 위해 방문한 버지니아의 리치먼드에서 나는 깜짝 놀라는 경험을 하였다. 차를 세울 수도 없는 교차로 중앙에 좌대만이 덩그러니 남은 기념비를 운전 중 만난 것이다. 그것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남부연합의 장군이었던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기념비의 일부였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흑인 인권운동의 여파로 이에 반하는 많은 기념비적 조각들이 그 자리에서 철거되었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인권 유린의 사건으로 성난 군중에 의해 특정 기념비적 조각은 훼손되고 끌려 내려오는 순간을 담은 많은 뉴스 보도를 보았기에 사실 좌대만이 남은 기념비를 본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이러한 실물을 대하는 것은 꽤 충격적이고 조금 과장을 한다면 알 수 없는 전율(?)이 이는 일이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 느낌은 마치 갤러리 저 구석에 샘이란 제목으로 의도적으로 거꾸로 놓인 뒤샹의 변기를 만난 관람객이 느꼈을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을까?
토마스 조나단 잭슨( Thomas Jonathon Jackson)은 1861년 7월 남북전쟁 당시 리치먼드까지 진격한 북부연합의 공격에 맞서 승리한 후 ‘돌로 만든 벽 (Stonewall)’ 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는 남부연합의 용장이다. 그의 기념비는 1919년 화강암 좌대 위에 말을 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브론즈로 제작하였는데 로버트 리, 제임스 이웰 브라운 스튜어트, 제퍼슨 데이비스 등의 다른 남부연합 영웅들의 기념비가 있는 모뉴먼트 에비뉴에 세워진다. 2020년 인종차별 시위가 확산하면서 그의 조각은 시에 의해 해체되고 철거되는데 현재 그곳에는 스톤월 잭슨을 떠받치고 있던 좌대만이 남아있다.
조각가로 난 이 남겨진 좌대에 주목하고 싶다. 현대 조각의 역사에서 조각은 더이상 좌대위에 위치하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오기도 하며 좌대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조각이 되는 사고의 전환이 있었다. 우리는 일상의 레디메이드 오브제인 변기가 뒤집어져 갤러리에 “샘(Fountain)”이란 제목으로 전시됨으로 더럽고 일상적인 도구에서 귀하고 주인공이되는 예술로 전복되는 가치의 전환을 만들며 현대미술의 큰 전환점이 된 뒤샹의 작업을 알고 있다. 스톤월 잭슨 기념비의 좌대가 이러한 뒤샹의 샘 작업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것이 최근 기념비적 조각의 철거에 관한 찬반 논쟁의 하나의 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역사 속 수많은 인물을 다시 한번 ‘정의, 자유, 인권’ 등의 잣대로 평가한 후 그들의 역사적 위치를 재고해 봐야 한다는데는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기념비적 조각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가치 기준의 문제를 담고 있는 부분이기에 계속되는 화두가 되고 있고 이에 대한 변화의 요구가 계속되는 것이다. 이중 특정 기념비적 조각의 철거 문제가 대두되며 찬반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철거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며 교훈으로 삼는 도구로 유지할 것인가? 수많은 프로테스터들의 폭력적인 기념비 조각 훼손 영상을 본 나는 처음에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역사의 교훈이 되는 한 부분으로 남겨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한 흑인 여성의 울부짖는 인터뷰를 보며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녀는 노예제를 옹호한 인종차별주의자의 기념비 아래를 매일 지나는 것이 얼마나 그녀와 가족에게 가슴 아픈일인 것인지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예를 들어 그들의 입장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에게 저 기념비는 유대인 커뮤니티에 나치의 심볼을 세워놓는 것과 같다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고통받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이 기념물들이 역사의 교훈이 되는 부분으로 남겨야 한다면 누구에게 교훈이 된다는 것인가? 여기서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은 그 피해와 희생의 그룹이 아니었을까? 나는 여전히 삼자였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옳지 않은 과거를 담은 기념비적 조각들은 철거되어야 한다. 그것이 조형 언어의 문제이건(예를 들자면, 워싱턴 디시 해방 기념관에 링컨 대통령 기념 조각, 뉴욕 자연사 박물관앞의 T.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마 조각 등), 인물 자체의 문제이건간에 이러한 기념 조각은 더는 역사 속 공공 기념물로서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치워지고 지워지는 것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부분의 답을 여전히 찾고 있지만, 버지니아의 리치먼드에서 적어도 두 개의 답을 찾은 것 같다. 그 하나는 새로운 역사에 맞는 새로운 기념물 조각을 만드는 것이다. 키힌데 와일리 (Kehinde Wiley) 의 “전쟁의 루머 (Rumors of war)”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치워진 역사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스톤월 잭슨의 남겨진 좌대는 이제는 더이상 보조적 역할이 아닌 지난 프로테스터들의 스프레이 페인트로 남긴 역사의 흔적을 옅게 몸에 지닌 채 (뒤샹의 소변기의 작가의 사인과 같이 ) 그 자체로 기념비 조각이 되었고 그 위의 비워진 공간은 그 어떤 새로운 조형물보다 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국의 비영리 단체로서 인권 문제의 피해자들을 위한 법률적 지원을 하는 남부 빈곤 법률센터 (Southern Poverty Law Center)는 통계자료에서 2020년 5월 25일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지금까지 미 전역에 걸쳐 인종차별과 인권유린 문제와 관련된 공공기념물이 100개 이상이 제거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공공기념물은 정부 건물, 기념비 및 동상, 명판, 학교, 공원, 카운티, 도시, 군사 자산, 거리 및 고속도로 등 생각보다 광범위한데 기념비와 기념 조각이 물론 많은 수를 차지한다. 오늘 방문한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모뉴먼트 에비뉴에도 지난 글에서 언급한 제임스 이웰 브라운 스튜어트, 윗글의 스토월 잭슨의 인물상을 포함하여 남부연합군의 대통령을 지낸 제퍼슨 데이비스와 유명한 해양학자이자 남부연합의 또 다른 영웅이었던 매튜 폰테인 머리 등의 인물상이 2020년 철거되었다. 그들은 사라졌으나 비워진 흔적을 담은 남겨진 기념물들은 역사의 평가를 담은 새로운 기념 조각이 되어 각각의 위치에서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조각가의 눈으로 본 새로운 기념비적 조각 “전쟁의 루머 (Rumors of War)”
버지니아 미술관 ( Virginia Museum of Fine Art) 앞에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기념비적 조각이 세워졌다. “전쟁의 루머 (Rumors of war)”라는 제목의 이 조각은 미국출신의 아티스트인 키힌데 와일리 (Kehinde Wiley, 1977-)에 의해 2019년 제작된 것으로 버지니아 미술관 역사상 가장 큰 커미션이 주어진 작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작가로 잘 알려진 키힌데 와일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그의 작업은 그와 같은 젊은 흑인 남성을 주로 모델로 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예술사 속의 작품들의 장면, 특히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역사 속 인물의 초상화 속 포즈를 젊은 흑인 남성들로 모방하게 한 후 이를 사진 찍거나 유화로 그려낸다. 이 인물들은 여러 문화권의 고전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프레임과 배경으로 의도적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러한 전통적인 양식과 현대적 인물의 묘한 조화가 그만의 독특한 언어를 만들어낸다.
“전쟁의 루머”를 실제로 보기 위해 방문한 버지니아 미술관에도 이러한 그의 회화작업 한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1625년 네덜란드 할렘 출신의 옷감상인이었던 윌렘 반 헤이투이슨(Willem Van Heythuysen)의 초상을 2006년 뉴욕 할렘의 한 흑인 젊은 청년의 초상으로 대체하여 그려진 작업이다. 이 작업 속의 인물은 원 초상화의 인물의 포즈와 태도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고 실물보다 큰 크기로 제작되었다. 전통 초상화들에 많이 사용되는 두꺼운 금색 프레임과 화려하고 장식적인 꽃 패턴의 배경과는 달리 그 안의 인물은 2006년 당시 뉴욕의 유행 아이템인 션존(Sean John) 스트리트웨어와 팀버랜드(Timber Land)부츠를 신고 있는데 이와 같은 어쩌면 어색하고 기대하지 않은 조합은 와일리의 조각에서도 그대로 찾을 수 있었다.
“전쟁의 루머 (Rumors of war)” 조각은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기념비적 조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견고한 대리석으로 된 좌대위에 사실적으로 묘사된 인물이 브론즈로 주조된 것은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통적 기념비 조각의 표현양식이다. 와일리의27피트( 8.2m) 높이에 16 피트(4.9m) 길이의 이 거대한 조각에서도 이 양식은 의도적으로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익숙한 사다리꼴의 석 좌대가 있고 그 위에는 거의 검정의 가까운 어두운색의 브론즈로 주조된 인물의 모습이 있다. 이 인물은 근육질의 말을 타고 마치 전쟁 중 선두에 서서 목표를 향하고 있는 듯한 영웅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본 인물은 우리가 기대한 그런 전쟁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이 조각 속의 인물은 마치 뉴욕의 브루클린이나 할렘 거리를 지나며 만날 수 있는 우리의 젊은 흑인 친구의 모습이다. 안장 위에 인물은 그의 헤리티지를 잘 나타내는 드레드록스(Dreadlocks) 일명 레게 헤어스타일의 머리를 묶고 있고 우리 옷장에 적어도 하나는 있을듯한 무릎이 찢어진 진을 입고 있으며 한참 동안 많이들 갖고 싶어했던 발목이 올라온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는 나의 친구이다.
와일리는 이 조각에 관하여 2016년 본인의 전시로 방문한 리치먼드에서 보게 된 남부 연합의 기념비적 조각들이 이 작품 시작의 동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는 남부 연합 국가의 수도로 지금도 모뉴먼트 에비뉴에는 당시 노예제를 지지하였던 남부 연합 영웅들의 기념 조각들이 있는데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와일리가 이러한 기념 조각들을 지나면서 느꼈을 감정은 우리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와일리는 수많은 기념 조각 중 남부 연합군 장군인 제임스 이웰 브라운( J. E. B.)의 동상을 “전쟁의 루머” 조각의 모델로 삼았다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두 조각은 인물을 제외하고는 매우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작업의 제목을 성경의 마태복음 24장 6절에서 예수가 재난의 때를 설명하는 구절에서 “전쟁의 루머”라는 단어를 인용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심판의 때를 앞에 두고 혼란과 재난 속에 이를 리드하는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표현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의 역사적 기념비들이 보여주고 있던 인종과 가치의 편협한 해석의 문제 전복을 위한 전쟁을 기념하는 것인지 제목과 작품을 보며 나는 나름의 해석을 해 보려 아직도 노력하고 있다.
2019년 9월 27일 이 조각은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뉴욕의 타임스퀘어에서 마치 새로운 기념비적 조각 역사의 시작을 알리듯 그 첫선을 보인다. 몇 주의 전시 후 2019년 12월 10일 “전쟁의 루머” 는 와일리가 그 작업의 영감을 받은 곳이기도 하며, 또한 역사적인 면에서 새로운 기념비의 장소적 의미가 있게 될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로 옮겨져 영구 설치되었다. 나는 2021년 1월 이 조각을 실제로 보기 위해 리치먼드를 방문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는 이제는 “전쟁의 루머” 제작의 원 본격인 기념 조각 제임스 이웰 브라운( J. E. B.) 동상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조지 플로이드의 사건 이후 일어난 흑인 인권운동의 여파로 2020년 7월 모뉴먼트 에비뉴의 몇몇 동상들은 리치먼드 시에 의해 치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기념비적 조각의 역사가 새로 쓰이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은 다음 호에 “사라진 기념비적 조각들”로 이어집니다.
버지니아 미술관 ( Virginia Museum of Fine Art) 앞에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기념비적 조각이 세워졌다. “전쟁의 루머 (Rumors of war)”라는 제목의 이 조각은 미국출신의 아티스트인 키힌데 와일리 (Kehinde Wiley, 1977-)에 의해 2019년 제작된 것으로 버지니아 미술관 역사상 가장 큰 커미션이 주어진 작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작가로 잘 알려진 키힌데 와일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그의 작업은 그와 같은 젊은 흑인 남성을 주로 모델로 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예술사 속의 작품들의 장면, 특히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역사 속 인물의 초상화 속 포즈를 젊은 흑인 남성들로 모방하게 한 후 이를 사진 찍거나 유화로 그려낸다. 이 인물들은 여러 문화권의 고전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프레임과 배경으로 의도적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러한 전통적인 양식과 현대적 인물의 묘한 조화가 그만의 독특한 언어를 만들어낸다.
“전쟁의 루머”를 실제로 보기 위해 방문한 버지니아 미술관에도 이러한 그의 회화작업 한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1625년 네덜란드 할렘 출신의 옷감상인이었던 윌렘 반 헤이투이슨(Willem Van Heythuysen)의 초상을 2006년 뉴욕 할렘의 한 흑인 젊은 청년의 초상으로 대체하여 그려진 작업이다. 이 작업 속의 인물은 원 초상화의 인물의 포즈와 태도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고 실물보다 큰 크기로 제작되었다. 전통 초상화들에 많이 사용되는 두꺼운 금색 프레임과 화려하고 장식적인 꽃 패턴의 배경과는 달리 그 안의 인물은 2006년 당시 뉴욕의 유행 아이템인 션존(Sean John) 스트리트웨어와 팀버랜드(Timber Land)부츠를 신고 있는데 이와 같은 어쩌면 어색하고 기대하지 않은 조합은 와일리의 조각에서도 그대로 찾을 수 있었다.
“전쟁의 루머 (Rumors of war)” 조각은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기념비적 조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견고한 대리석으로 된 좌대위에 사실적으로 묘사된 인물이 브론즈로 주조된 것은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통적 기념비 조각의 표현양식이다. 와일리의27피트( 8.2m) 높이에 16 피트(4.9m) 길이의 이 거대한 조각에서도 이 양식은 의도적으로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익숙한 사다리꼴의 석 좌대가 있고 그 위에는 거의 검정의 가까운 어두운색의 브론즈로 주조된 인물의 모습이 있다. 이 인물은 근육질의 말을 타고 마치 전쟁 중 선두에 서서 목표를 향하고 있는 듯한 영웅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본 인물은 우리가 기대한 그런 전쟁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이 조각 속의 인물은 마치 뉴욕의 브루클린이나 할렘 거리를 지나며 만날 수 있는 우리의 젊은 흑인 친구의 모습이다. 안장 위에 인물은 그의 헤리티지를 잘 나타내는 드레드록스(Dreadlocks) 일명 레게 헤어스타일의 머리를 묶고 있고 우리 옷장에 적어도 하나는 있을듯한 무릎이 찢어진 진을 입고 있으며 한참 동안 많이들 갖고 싶어했던 발목이 올라온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는 나의 친구이다.
와일리는 이 조각에 관하여 2016년 본인의 전시로 방문한 리치먼드에서 보게 된 남부 연합의 기념비적 조각들이 이 작품 시작의 동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는 남부 연합 국가의 수도로 지금도 모뉴먼트 에비뉴에는 당시 노예제를 지지하였던 남부 연합 영웅들의 기념 조각들이 있는데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와일리가 이러한 기념 조각들을 지나면서 느꼈을 감정은 우리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와일리는 수많은 기념 조각 중 남부 연합군 장군인 제임스 이웰 브라운( J. E. B.)의 동상을 “전쟁의 루머” 조각의 모델로 삼았다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두 조각은 인물을 제외하고는 매우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작업의 제목을 성경의 마태복음 24장 6절에서 예수가 재난의 때를 설명하는 구절에서 “전쟁의 루머”라는 단어를 인용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심판의 때를 앞에 두고 혼란과 재난 속에 이를 리드하는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표현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의 역사적 기념비들이 보여주고 있던 인종과 가치의 편협한 해석의 문제 전복을 위한 전쟁을 기념하는 것인지 제목과 작품을 보며 나는 나름의 해석을 해 보려 아직도 노력하고 있다.
2019년 9월 27일 이 조각은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뉴욕의 타임스퀘어에서 마치 새로운 기념비적 조각 역사의 시작을 알리듯 그 첫선을 보인다. 몇 주의 전시 후 2019년 12월 10일 “전쟁의 루머” 는 와일리가 그 작업의 영감을 받은 곳이기도 하며, 또한 역사적인 면에서 새로운 기념비의 장소적 의미가 있게 될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로 옮겨져 영구 설치되었다. 나는 2021년 1월 이 조각을 실제로 보기 위해 리치먼드를 방문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는 이제는 “전쟁의 루머” 제작의 원 본격인 기념 조각 제임스 이웰 브라운( J. E. B.) 동상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조지 플로이드의 사건 이후 일어난 흑인 인권운동의 여파로 2020년 7월 모뉴먼트 에비뉴의 몇몇 동상들은 리치먼드 시에 의해 치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기념비적 조각의 역사가 새로 쓰이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은 다음 호에 “사라진 기념비적 조각들”로 이어집니다.
조각가의 눈으로 본 조지 워싱턴의 마운트 버논과 노예 된 사람들의 기념관
(George Washington’s Mount Vernon and the Enslaved People’s Memorial)
워싱턴 디시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32-1799)의 이름을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수도 이름으로 워싱턴이 쓰인 것은 물론이며 디시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고도로 위치하는 워싱턴 모뉴먼트와 유명대학 중 하나인 조지 워싱턴 대학, 그리고 포토맥강 주변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조지 워싱턴 기념 파크웨이 등 그를 기념하는 것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디시에서 포토맥강을 따라 조지 워싱턴 파크웨이를 타고 남쪽으로 15 마일가량 내려가면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22살부터 67세로 서거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마운트 버논 (Mount Vernon)을 방문할 수 있다. 마운트 버논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그의 가족이 거의 45년간 거주한 그의 고향으로 현재는 버지니아 포토맥강가에 500에이커의 커다란 농장 대지 위에 그의 저택과 부대시설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강가를 내려다보는 절경을 가진 언덕에 위치한 저택은 미망인이 된 그의 형수로부터 1754년 대여할 시에는 작고 소박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후 1758년과 1775년 두 번에 걸친 공사로 워싱턴의 취향을 반영한 넓은 저택으로 재탄생하였다. 이중 특별히 포토맥강을 바라보고 있는 저택의 동쪽 면에 기둥이 많은 넓은 공간 (Piazza and Colonnades)을 만들었는데 워싱턴 가족은 이곳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의 이 공간은 일직선으로 나무의자를 쭉 놓아 방문객들이 앉아 포토맥강을 내려다 보며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저택은 붉은 지붕의 이층건물로 지붕의 한가운데에는 올리브 잎을 문 금색 비둘기 모양의 바람개비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워싱턴 대통령의 평화를 향한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이 저택의 양옆으로는 하인들이 머무는 공간과 부엌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전 농장 곳곳에 대장간, 방앗간, 세탁소, 직조소, 증류소, 소금 창고 등의 작은 건물들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정원을 비롯하여 식자재 텃밭과 작은 과수원, 그리고 축사 등을 농장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대지주로서의 삶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많은 인력에 의해 유지된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운트 버논에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영부인 마사 워싱턴 (Martha Washington)의 무덤이 있다. 워싱턴 대통령의 유언대로 시신은 사후 이장된 것으로 앞쪽 대리석의 관 안에 워싱턴 부부가 안치되어 있고 그 뒤쪽에는 23명의 가족이 가족묘의 형태로 안치되어 있다.
워싱턴 대통령의 묘를 지나 포토맥강 쪽으로 내려가면 또 다른 무덤을 발견할 수 있다. 마운트 버논에서 일하던 노예들의 무덤이다. 안내표지를 보고 찾아간 그곳에는 숲이 우거진 가운데 윗부분이 어슷하게 잘린 원통형의 조각이 있는 기념관이 있었다. 이 기념관은 1929년 마운트 버넌 여성 연합 (The Mount Vernon Ladies’ Association)에 의해 처음 발족된 작은 기념관이었으나 지금의 모습으로 1983년 재건축된 것이다. 하워드 대학교의 건축학도들이 디자인한 기념관은 작은 원형의 광장에 예전 노예의 삶에 그들이 의지하였던 성경의 단어인 “사랑”, “소망”, “믿음”을 돌에 새기고, “미완성된 삶 (life unfinished)”을 나타내는 회색의 잘린 화강암 기둥을 중앙에 두었다. 담담히 이 기념 조형물을 보고 돌아서는 이때 나는 기념관을 둘러싸고 있는 숲속 여기저기서 시들고 있는 꽃다발을 발견했다. 앗! 이건 뭐지...?
꽃다발을 향해 다가간 나는 꽃다발을 중심으로 땅 위에 실로 표시된 직사각형을 발견한다. 순간 나는 이 직사각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고 그 옆을 둘러본다. 그 옆에 또 그 옆에 저쪽 언덕을 넘어 보이지 않는 그곳에도 있는 시들어가는 꽃다발과 실 직사각형. 이곳은 마운트 버논에서 노예의 삶을 마친 이들이 묻혀 있는 곳이었다. 꽃다발과 실의 표시가 아니면 어떠한 작은 비석이나 봉분도 발견할 수 없다. 그저 평평한 땅 밑에 그들이 묻혀있는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언덕에는 100-150여 명 정도가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시체의 매장은 다리가 동쪽 강가를 향해 묻혔으며 이는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이루지 못한 희망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조지 워싱턴은 11세 때 아버지로부터 11명의 노예를 물려받았고, 마운트 버논에서는 적어도 577명의 노예가 살고 일하였다고 한다. 마운트 버논의 도널드 레이놀즈 뮤지엄 교육센터 (The Donald W. Reynolds Museum and Education Center)에서는 워싱턴의 삶을 기록하는 전시와 함께 “마운트 버논의 노예 된 사람들 (Enslaved People of Mount Vernon)”이라는 전시가 함께 이루어 지고 있다. 이 두 전시가 함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또한 이 전시들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부여한 상태를 나타내는 “노예 (Slave)”라는 단어 대신 그들의 인간성을 강조한 “노예 된 사람들 (Enslaved People)”이란 존엄한 표현을 배웠다. 전시 “마운트 버논의 노예 된 사람들”은 예전 스미소니언 초상화 갤러리에서 만난 플로라 (Flora)의 초상화를 기억나게 한다. 작자미상의 이 초상화는 판매 명세서에 판매의 대상인 플로라의 모습을 어떠한 디테일도 없이 단지 그녀의 실루엣을 누런 종이를 오려 표현한 것으로 그 초상화의 표현 방법에서 플로라라는 한 인간을 다루는 거칠고 낮은 태도를 읽으며 나는 충격에 싸였었다. 그 태도는 슬프게도 이곳 마운트 버논의 서쪽 언덕에서 낮게 묻힌 그들의 모습에서도 발견되었고 또한 2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역사에서도 누군가의 무릎에 짓눌려 질식사한 다른 조지(George)의 모습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이런 역사를 뒤돌아보며 객관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역사 속 과오와 이를 개선하려 했던 수많은 노력을 다시 한번 짚어보며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인간애를 다시 한번 불러내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마운트 버논에서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이.
(George Washington’s Mount Vernon and the Enslaved People’s Memorial)
워싱턴 디시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32-1799)의 이름을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수도 이름으로 워싱턴이 쓰인 것은 물론이며 디시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고도로 위치하는 워싱턴 모뉴먼트와 유명대학 중 하나인 조지 워싱턴 대학, 그리고 포토맥강 주변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조지 워싱턴 기념 파크웨이 등 그를 기념하는 것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디시에서 포토맥강을 따라 조지 워싱턴 파크웨이를 타고 남쪽으로 15 마일가량 내려가면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22살부터 67세로 서거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마운트 버논 (Mount Vernon)을 방문할 수 있다. 마운트 버논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그의 가족이 거의 45년간 거주한 그의 고향으로 현재는 버지니아 포토맥강가에 500에이커의 커다란 농장 대지 위에 그의 저택과 부대시설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강가를 내려다보는 절경을 가진 언덕에 위치한 저택은 미망인이 된 그의 형수로부터 1754년 대여할 시에는 작고 소박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후 1758년과 1775년 두 번에 걸친 공사로 워싱턴의 취향을 반영한 넓은 저택으로 재탄생하였다. 이중 특별히 포토맥강을 바라보고 있는 저택의 동쪽 면에 기둥이 많은 넓은 공간 (Piazza and Colonnades)을 만들었는데 워싱턴 가족은 이곳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의 이 공간은 일직선으로 나무의자를 쭉 놓아 방문객들이 앉아 포토맥강을 내려다 보며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저택은 붉은 지붕의 이층건물로 지붕의 한가운데에는 올리브 잎을 문 금색 비둘기 모양의 바람개비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워싱턴 대통령의 평화를 향한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이 저택의 양옆으로는 하인들이 머무는 공간과 부엌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전 농장 곳곳에 대장간, 방앗간, 세탁소, 직조소, 증류소, 소금 창고 등의 작은 건물들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정원을 비롯하여 식자재 텃밭과 작은 과수원, 그리고 축사 등을 농장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대지주로서의 삶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많은 인력에 의해 유지된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운트 버논에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영부인 마사 워싱턴 (Martha Washington)의 무덤이 있다. 워싱턴 대통령의 유언대로 시신은 사후 이장된 것으로 앞쪽 대리석의 관 안에 워싱턴 부부가 안치되어 있고 그 뒤쪽에는 23명의 가족이 가족묘의 형태로 안치되어 있다.
워싱턴 대통령의 묘를 지나 포토맥강 쪽으로 내려가면 또 다른 무덤을 발견할 수 있다. 마운트 버논에서 일하던 노예들의 무덤이다. 안내표지를 보고 찾아간 그곳에는 숲이 우거진 가운데 윗부분이 어슷하게 잘린 원통형의 조각이 있는 기념관이 있었다. 이 기념관은 1929년 마운트 버넌 여성 연합 (The Mount Vernon Ladies’ Association)에 의해 처음 발족된 작은 기념관이었으나 지금의 모습으로 1983년 재건축된 것이다. 하워드 대학교의 건축학도들이 디자인한 기념관은 작은 원형의 광장에 예전 노예의 삶에 그들이 의지하였던 성경의 단어인 “사랑”, “소망”, “믿음”을 돌에 새기고, “미완성된 삶 (life unfinished)”을 나타내는 회색의 잘린 화강암 기둥을 중앙에 두었다. 담담히 이 기념 조형물을 보고 돌아서는 이때 나는 기념관을 둘러싸고 있는 숲속 여기저기서 시들고 있는 꽃다발을 발견했다. 앗! 이건 뭐지...?
꽃다발을 향해 다가간 나는 꽃다발을 중심으로 땅 위에 실로 표시된 직사각형을 발견한다. 순간 나는 이 직사각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고 그 옆을 둘러본다. 그 옆에 또 그 옆에 저쪽 언덕을 넘어 보이지 않는 그곳에도 있는 시들어가는 꽃다발과 실 직사각형. 이곳은 마운트 버논에서 노예의 삶을 마친 이들이 묻혀 있는 곳이었다. 꽃다발과 실의 표시가 아니면 어떠한 작은 비석이나 봉분도 발견할 수 없다. 그저 평평한 땅 밑에 그들이 묻혀있는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언덕에는 100-150여 명 정도가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시체의 매장은 다리가 동쪽 강가를 향해 묻혔으며 이는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이루지 못한 희망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조지 워싱턴은 11세 때 아버지로부터 11명의 노예를 물려받았고, 마운트 버논에서는 적어도 577명의 노예가 살고 일하였다고 한다. 마운트 버논의 도널드 레이놀즈 뮤지엄 교육센터 (The Donald W. Reynolds Museum and Education Center)에서는 워싱턴의 삶을 기록하는 전시와 함께 “마운트 버논의 노예 된 사람들 (Enslaved People of Mount Vernon)”이라는 전시가 함께 이루어 지고 있다. 이 두 전시가 함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또한 이 전시들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부여한 상태를 나타내는 “노예 (Slave)”라는 단어 대신 그들의 인간성을 강조한 “노예 된 사람들 (Enslaved People)”이란 존엄한 표현을 배웠다. 전시 “마운트 버논의 노예 된 사람들”은 예전 스미소니언 초상화 갤러리에서 만난 플로라 (Flora)의 초상화를 기억나게 한다. 작자미상의 이 초상화는 판매 명세서에 판매의 대상인 플로라의 모습을 어떠한 디테일도 없이 단지 그녀의 실루엣을 누런 종이를 오려 표현한 것으로 그 초상화의 표현 방법에서 플로라라는 한 인간을 다루는 거칠고 낮은 태도를 읽으며 나는 충격에 싸였었다. 그 태도는 슬프게도 이곳 마운트 버논의 서쪽 언덕에서 낮게 묻힌 그들의 모습에서도 발견되었고 또한 2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역사에서도 누군가의 무릎에 짓눌려 질식사한 다른 조지(George)의 모습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이런 역사를 뒤돌아보며 객관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역사 속 과오와 이를 개선하려 했던 수많은 노력을 다시 한번 짚어보며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인간애를 다시 한번 불러내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마운트 버논에서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이.
조각가의 눈으로 본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기념관
(Franklin Delano Roosevelt Memorial)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거나 오랜 기간 고생한 희생자가 있는가 하면 감염 예방과 확산방지를 위하여 실시되고 있는 격리조치 등에 의해 위축된 경제로 우리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미국 내 실업률이 대공황 이후 최고치를 보이는 가운데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미국에서는 경기부양책으로 코로나 지원금을 국민에게 일괄지급하는가 하면, 소상인 융자, 실업수당 특별 지원금 등 나름의 구제정책을 내놓고 있고 또 각 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맥락의 팬데믹 구제정책을 마련하여 실행하고 있는 와중 얼마 전 한국에서는 경기회복을 위하여 ‘한국판 뉴딜’을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뉴 딜(New Deal)은 미국에서 대공항으로 침체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하여 1933년부터 1936년에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에 의하여 실행된 경기부양책이다. 이는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복지를 포함한 경제구조를 개혁하여 미국의 대공황 타계와 경제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획을 긋는 성공한 경제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본적인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선상에서 경제적 위기의 상황에 정부의 적절한 개입과 지원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 딜(New Deal)” 정책은 지금과 같은 세계적 경제적 위기상황에서 참고하기 적절한 선례가 됨이 틀림이 없다. 이러한 정책을 실시한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대통령에 관한 궁금함과 함께 워싱턴 디시에 위치한 그의 기념관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워싱턴 디시의 인공호수인 타이들 베이슨(Tidal Basin)에 위치한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기념관은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기념관 사이에 놓여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제 32대 대통령으로 대공황시기에 뉴딜정책을 추진하여 경제공황을 극복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를 이끈 지도자로 그 업적이 요약된다. 그의 기념관은 마치 호숫가를 따라 조성된 공원과 같이 평평한 대지 위에 수많은 꽃과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 산책로를 따라 누구나 편안하게 접근하여 돌아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헌정된 기념관은 7.5에이커라는 넓은 대지에 조성되었다. 바닥과 구조들은 붉은색이 도는 사우스 다코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는데, 기념관 전체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남긴 수많은 문장이 이 화강암벽에 새겨져 있었다. 가지지 못한 자를 배려하고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며 평화를 갈망하는 그의 인생과 정치철학을 그의 글들이 새겨진 기념관을 둘러보며 읽을 수 있었다.
기념관은 공모에서 선택된 조경 건축가 로렌스 할프린( Lawrence Halprin)에 의하여 디자인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4번을 연임하여 12년을 재직하였는데 기념관 공간을 5개의 야외 방으로 나누어 첫 번째 방을 프롤로그로 시작하여 나머지 4개의 방은 각각 4년의 임기를 나타내도록 디자인하였다. 각 방에는 은유적인 의미를 가진 폭포가 있는데 한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폭포는 더 크고 복잡해지고 이는 경제침체와 세계전쟁에 따른 늘어난 대통령의 역할을 대변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디자인이라고 설명한다. (안타깝게도 방문 시에는 기술적인 문제로 물이 흐르는 폭포는 볼 수 없었다) 기념관 중앙 부분에는 커다란 브론즈로 제작된 좌상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동상이 그의 애견과 함께 놓여 있었다. 영부인이었던 엘레노아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의 조각상도 볼 수 있는데 역대 대통령 기념관 중 유일하게 영부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영부인은 유엔의 첫 번째 미국 대표라는 설명과 함께 입상으로 제작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쟁을 혐오하고 하나의 국가만의 노력이 아닌 국가들 간의 협력을 통한 평화를 강조하는 대통령 부부 각자의 노력을 반영한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성인이 되어 앓게 된 소아마비로 인하여 장애를 갖게 되어 임기 내내 휠체어 생활을 하였다. 루스벨트 기념관은 이러한 대통령의 배경을 고려하여 다양한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기념관을 만들려 노력하였다고 한다. 전 기념관을 휠체어 접근이 용이하게 만들었고, 기념관 조각 중에도 시각장애인을 배려한 만져 볼 수 있고 점자가 새겨진 조각이 있다. 조각가 로버트 그래함( Robert Graham)이 1997년 제작한 “소셜 프로그램 (Social Programs)”이 그것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에 따라 시작된 54개의 프로그램을 작업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5개의 브론즈 패널과 5개의 기둥을 제작하였는데 각각 6피트 x 6피트 (180센티) 인 커다란 패널에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작업자들의 손과 얼굴을 배경으로 넣고 각 프로그램의 이미지를 부조로 제작하였다. 또한 그 프로그램의 이름을 점자로 새겨 놓았다. 롤러와 같은 산업인쇄기로 설명되는 5개의 원기둥에는 음각으로 이 이미지들과 점자들이 새겨있다. 이 작업은 시각장애인들이 만져볼 수 있는 의도로 제작되었는데 실제로 관람한 작업에서는 이 역할이 어려우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작업이 생각보다 높게 위치하여 전체를 만져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며 시각장애인들이 이용하는 점자는 손끝의 감각에 맞추어 훈련될 수 있도록 한가지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이 작업의 점자는 그 코드는 빌렸으나 그 크기와 점의 간격이 다르기에 시각장애인들이 이를 만져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 아닌 일반 관람자에게는 만져볼 수 있도록 이미지와 점자를 함께 사용하여 장애인을 배려한 작업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
대공황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는 시민들을 묘사한 조각가 조지 시걸 (George Segal)의 작품이 오랫동안 나를 붙들었다. 조지 시걸은 석고붕대를 이용하여 실제 인물을 떠내는데 이것을 본 주물을 위한 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다시 붙여 속이 비어있는 거친 표면의 인물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은 석고붕대의 표면을 통해 실제의 모습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어느 정도의 익명성을 갖게 되는데 루스벨트 기념관에서 본 그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브론즈로 마무리되었고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있는 농부 부부의 모습과 빵 배급을 줄 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모습의 조각상이다. 어쩌면 약간은 유령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절망과 힘겨움을 가진 그 누구인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그 속에서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기다림의 줄이 6피트의 사회적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 이 조각의 벽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복지 정책의 근본 철학이 담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우리의 발전의 여부는 많이 가진 자에게 많은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충분하게 제공하는가에 있다. (The test of our progress is not whether we add more to the abundance of those who have much; it is whether we provide enough for those who have too little.)’
미국 사회에서 “가진 자” 흔히 말하는 “엄친아”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념관에서 나는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빈곤층, 여성 등을 만났다. 인종과 관련된 부분은 이 글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기념관의 곳곳에서 이에 관한 화합과 협력의 메시지 또한 발견하였다. 대공황으로부터 한 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우리는 글로벌 팬데믹속에서 매일의 삶과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또 하나의 공황을 맞이하고 있으며 이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익에 날이 서 있다. 이러한 때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의 선례를 돌아보는 것은 적어도 이 상황 극복에 대한 해답의 일부를 제시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에서이다. 어려움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며 서로 협력하여 일어설 때 우리 사회 전체는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올바른 가치관과 정치 철학을 가진 리더쉽이 절실히 요구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나를 포함한 각각의 개인의 자각이 먼저임을 깨달으며 나는 나 자신에게 “김현정판 뉴딜” 프로젝트를 지금 나의 위기의 삶 속에 진행해 보기로 한다. 여러분도 각자의 뉴딜을 같이 해보지 않겠습니까?
(Franklin Delano Roosevelt Memorial)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거나 오랜 기간 고생한 희생자가 있는가 하면 감염 예방과 확산방지를 위하여 실시되고 있는 격리조치 등에 의해 위축된 경제로 우리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미국 내 실업률이 대공황 이후 최고치를 보이는 가운데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미국에서는 경기부양책으로 코로나 지원금을 국민에게 일괄지급하는가 하면, 소상인 융자, 실업수당 특별 지원금 등 나름의 구제정책을 내놓고 있고 또 각 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맥락의 팬데믹 구제정책을 마련하여 실행하고 있는 와중 얼마 전 한국에서는 경기회복을 위하여 ‘한국판 뉴딜’을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뉴 딜(New Deal)은 미국에서 대공항으로 침체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하여 1933년부터 1936년에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에 의하여 실행된 경기부양책이다. 이는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복지를 포함한 경제구조를 개혁하여 미국의 대공황 타계와 경제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획을 긋는 성공한 경제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본적인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선상에서 경제적 위기의 상황에 정부의 적절한 개입과 지원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 딜(New Deal)” 정책은 지금과 같은 세계적 경제적 위기상황에서 참고하기 적절한 선례가 됨이 틀림이 없다. 이러한 정책을 실시한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대통령에 관한 궁금함과 함께 워싱턴 디시에 위치한 그의 기념관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워싱턴 디시의 인공호수인 타이들 베이슨(Tidal Basin)에 위치한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기념관은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기념관 사이에 놓여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제 32대 대통령으로 대공황시기에 뉴딜정책을 추진하여 경제공황을 극복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를 이끈 지도자로 그 업적이 요약된다. 그의 기념관은 마치 호숫가를 따라 조성된 공원과 같이 평평한 대지 위에 수많은 꽃과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 산책로를 따라 누구나 편안하게 접근하여 돌아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헌정된 기념관은 7.5에이커라는 넓은 대지에 조성되었다. 바닥과 구조들은 붉은색이 도는 사우스 다코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는데, 기념관 전체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남긴 수많은 문장이 이 화강암벽에 새겨져 있었다. 가지지 못한 자를 배려하고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며 평화를 갈망하는 그의 인생과 정치철학을 그의 글들이 새겨진 기념관을 둘러보며 읽을 수 있었다.
기념관은 공모에서 선택된 조경 건축가 로렌스 할프린( Lawrence Halprin)에 의하여 디자인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4번을 연임하여 12년을 재직하였는데 기념관 공간을 5개의 야외 방으로 나누어 첫 번째 방을 프롤로그로 시작하여 나머지 4개의 방은 각각 4년의 임기를 나타내도록 디자인하였다. 각 방에는 은유적인 의미를 가진 폭포가 있는데 한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폭포는 더 크고 복잡해지고 이는 경제침체와 세계전쟁에 따른 늘어난 대통령의 역할을 대변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디자인이라고 설명한다. (안타깝게도 방문 시에는 기술적인 문제로 물이 흐르는 폭포는 볼 수 없었다) 기념관 중앙 부분에는 커다란 브론즈로 제작된 좌상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동상이 그의 애견과 함께 놓여 있었다. 영부인이었던 엘레노아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의 조각상도 볼 수 있는데 역대 대통령 기념관 중 유일하게 영부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영부인은 유엔의 첫 번째 미국 대표라는 설명과 함께 입상으로 제작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쟁을 혐오하고 하나의 국가만의 노력이 아닌 국가들 간의 협력을 통한 평화를 강조하는 대통령 부부 각자의 노력을 반영한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성인이 되어 앓게 된 소아마비로 인하여 장애를 갖게 되어 임기 내내 휠체어 생활을 하였다. 루스벨트 기념관은 이러한 대통령의 배경을 고려하여 다양한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기념관을 만들려 노력하였다고 한다. 전 기념관을 휠체어 접근이 용이하게 만들었고, 기념관 조각 중에도 시각장애인을 배려한 만져 볼 수 있고 점자가 새겨진 조각이 있다. 조각가 로버트 그래함( Robert Graham)이 1997년 제작한 “소셜 프로그램 (Social Programs)”이 그것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에 따라 시작된 54개의 프로그램을 작업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5개의 브론즈 패널과 5개의 기둥을 제작하였는데 각각 6피트 x 6피트 (180센티) 인 커다란 패널에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작업자들의 손과 얼굴을 배경으로 넣고 각 프로그램의 이미지를 부조로 제작하였다. 또한 그 프로그램의 이름을 점자로 새겨 놓았다. 롤러와 같은 산업인쇄기로 설명되는 5개의 원기둥에는 음각으로 이 이미지들과 점자들이 새겨있다. 이 작업은 시각장애인들이 만져볼 수 있는 의도로 제작되었는데 실제로 관람한 작업에서는 이 역할이 어려우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작업이 생각보다 높게 위치하여 전체를 만져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며 시각장애인들이 이용하는 점자는 손끝의 감각에 맞추어 훈련될 수 있도록 한가지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이 작업의 점자는 그 코드는 빌렸으나 그 크기와 점의 간격이 다르기에 시각장애인들이 이를 만져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 아닌 일반 관람자에게는 만져볼 수 있도록 이미지와 점자를 함께 사용하여 장애인을 배려한 작업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
대공황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는 시민들을 묘사한 조각가 조지 시걸 (George Segal)의 작품이 오랫동안 나를 붙들었다. 조지 시걸은 석고붕대를 이용하여 실제 인물을 떠내는데 이것을 본 주물을 위한 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다시 붙여 속이 비어있는 거친 표면의 인물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은 석고붕대의 표면을 통해 실제의 모습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어느 정도의 익명성을 갖게 되는데 루스벨트 기념관에서 본 그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브론즈로 마무리되었고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있는 농부 부부의 모습과 빵 배급을 줄 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모습의 조각상이다. 어쩌면 약간은 유령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절망과 힘겨움을 가진 그 누구인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그 속에서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기다림의 줄이 6피트의 사회적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 이 조각의 벽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복지 정책의 근본 철학이 담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우리의 발전의 여부는 많이 가진 자에게 많은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충분하게 제공하는가에 있다. (The test of our progress is not whether we add more to the abundance of those who have much; it is whether we provide enough for those who have too little.)’
미국 사회에서 “가진 자” 흔히 말하는 “엄친아”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념관에서 나는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빈곤층, 여성 등을 만났다. 인종과 관련된 부분은 이 글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기념관의 곳곳에서 이에 관한 화합과 협력의 메시지 또한 발견하였다. 대공황으로부터 한 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우리는 글로벌 팬데믹속에서 매일의 삶과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또 하나의 공황을 맞이하고 있으며 이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익에 날이 서 있다. 이러한 때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의 선례를 돌아보는 것은 적어도 이 상황 극복에 대한 해답의 일부를 제시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에서이다. 어려움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며 서로 협력하여 일어설 때 우리 사회 전체는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올바른 가치관과 정치 철학을 가진 리더쉽이 절실히 요구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나를 포함한 각각의 개인의 자각이 먼저임을 깨달으며 나는 나 자신에게 “김현정판 뉴딜” 프로젝트를 지금 나의 위기의 삶 속에 진행해 보기로 한다. 여러분도 각자의 뉴딜을 같이 해보지 않겠습니까?
조각가의 눈으로 본 국립 9.11 박물관
국립 9.11 박물관은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타 부지에 건립되었으며 투윈타워 남쪽과 북쪽에 각각 놓인 기념물 “부재의 반영(Reflecting Absence)” 사이에 있다. 9.11 기념관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면 박물관은 그 역사를 진술, 기록, 교육하며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의 영향을 검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박물관은 주위의 건물들에 비하여 낮은 높이로 전면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전체적 모양을 추측하기 어려운 뾰족하며 기하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물 외벽은 반사가 되는 유리와 금속으로 제작되어 있고 표면이 줄무늬로 디자인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와 재질 등의 조합은 마치 무너져 내린 투윈타워의 일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 9.11박물관의 파빌리온을 설계한 노르웨이계의 건축회사 스노헤타( Snøhetta)는 기존의 세계무역센터 잔재를 살리는 것이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박물관의 입장은 다른 박물관과 기념관보다 엄격하였다. 마치 공항과 같은 보안 검색대를 거쳐 입장하면 곧바로 긴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지하전시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에스켈레이터의 한쪽에는 두 개의 커다란 삼지창의 모습을 한 철제 기둥이 서 있는데 이는 기존의 트윈타워 북쪽 건물 앞쪽에 위치하던 지지 구조물의 일부로 이 박물관의 공간이 같은 현장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을 하고 있는 박물관 내부는 마치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동굴 형태의 깊은 무덤 터를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안내자는 현장 유물들의 보존을 위하여 어두운 조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는데 그외에도 이 공간이 실제 많은 희생자의 희생장소이며 미확인된 사체가 안치된 공간이기도 한것을 생각할때 어둠이 그 경건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더욱 조성하였다.
9.11 테러가 일어나기 몇십 분 전인 오전 8시 30분의 무역센터의 전경을 담은 사진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두운 굴다리와 같은 이길에는 사건당시 실종자들을 찾는 포스터들을 담은 이미지들이 벽과 기둥 등에 투사되고 있는데 실종자의 사진과 특징 등 애절함이 담긴 가족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각자의 포맷으로 작성된 어수선한 포스터들은 소리가 없는 이미지일 뿐인데 마치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애타는 가족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서로의 음성들이 복잡하게 얽혀 환청으로 들리는 듯하다. 이 길을 지나면 천장이 높은 뚫린 공간을 위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이곳이 본격적 박물관 내부이다.
이 박물관의 기획은 내용에 있어 보존(preservation), 기념(commemoration), 교육(education), 고무(inspiration)의 네 가지를 목표로 진행되었고 이는 장소 자체가 유물인 이 공간 내에서 체계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박물관의 가장 깊은 공간으로 내려가기 위한 수직적 공간이동의 자리에는 오래되고 부서진 계단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계단은 예전 수많은 생존자가 이 계단을 이용하여 탈출하였다 하여 “생존자의 계단 (Survivors’ Staircase)” 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는 “방어벽 (Slurry Wall)” 과 “마지막 기둥 (Last Colum)” 과 함께 몇몇 중요한 기존부지의 잔재로 기억되는 것으로 이처럼 보전되어 박물관 건립 시 옮겨져 이곳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지난 달의 글에서 언급하였던 기념관의 최하부, 수많은 눈물이 모아 떨어진 그곳을 박물관 안에서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그들이 있었다. 2,983명의 희생자. 북쪽 기념관의 하단에는 사건의 역사적인 자료를 담은 전시실이 있고 남쪽 기념관의 하단에는 각 희생자의 개인적 기록을 담은 전시실이 있다. 특별히, 기념 전시인 “…를 기리며 ( In Memoriam)”의 전시관에 들어서는 순간 빼곡한 희생자의 사진들이 나를 압도한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었을, 아버지고 어머니였을, 어쩌면 내 이웃사촌이었을 익숙해 보이는 얼굴들을 만난다. 그런데 그 얼굴들이 이 벽에서 저 벽으로 사방에 너무나 빽빽하게 많아 순간 참아왔던 눈물이 터진다. 전시장에는 또한 각 희생자의 자료들을 담은 터치 테이블이 있는데 희생자를 찾아 클릭할 수 있다.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슨 공부를 했고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가족은 누구이며 친구와 가족들이 얼마나 그/그녀를 사랑했는지까지 사진, 음성 등을 통해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각 희생자의 죽음이 아닌 그들의 삶을 이렇게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개인적인 방법으로 기념하고 있었다.
북쪽기념관 전시장과 남쪽기념관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메모리얼 홀에는 하늘을 닮은 푸른 타일들이 붙어 있는 거대한 벽이 있다. 제목이 “그 9월 아침 하늘의 색을 기억하려고(Trying to remember the color of the sky on that September Morning)” 인 이 작업은 제목에서 설명하듯 9월 11일 당일 각기 다른 하늘의 모습을 그린 푸른 수채화이다. 아티스트 스팬서 핀치 (Spencer Finch)는2,893명의 희생자를 각각의 하늘의 모습으로 반영하여 그들을 기념하고 있다. 이 벽의 뒤에는 9.11 사태 시 수습되지 못한 미확인된 희생자들이 안치되어 있기에 어쩌면 가장 큰 아픔의 공간을 가장 아름답고 시적으로 기념하여 장식하고 있다는 생각하였다. 또한 이 벽에는 로마의 시인 버질의 아이네이스( Virgil’s Aeneid)로부터 인용한 문구 “어느 날도 당신을 그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지울 수 없습니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he time)” 가 적혀있다. 아티스트 톰 조이스 (Tom Joyce)는 세계무역센터에서 발견된 상처나고 구겨진 강철 조각들을 다시 열을 가하고 두드리고 접는 단조의 과정을 통해 강철 조각들을 희망과 아름다움을 담는 문자로 제 탄생시켰는데 각 문자는 대략 100파운드 정도의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제작 과정과 결과물은 이 쉽지 않은 역사적인 상처를 들춰내어 기록하고 매만져 돌보는 과정이 결국은 연단의 과정이 되어 무겁지만 더 단단하게, 우리에게 희망과 약속의 메시지를 안겨주는 역사로 거듭남을 상징하는듯하다.
수많은 희생을 담은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픔과 슬픔 심지어 분노가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경험한다. 그러나 박물관을 떠날 때 나는 더는 슬픔에 갇혀있지 않은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한 비극의 상황 속에 발현된 인류애를 보았고 지켜야 할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의 동굴과 같이 생각되었던 국립 9.11 박물관은 사실은 부활의 동굴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를 다시 자각게 하고 변하게 하는 공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어두운 지하 박물관에서 올라와 바라본 기념공원에는 이러한 나의 변화를 반기는 것이 있지 않은가. 기념공원에 심어진 “생존자 나무(Survivor Tree)”. 새로 심어진 400여 그루의 나무들과 함께 생존자 나무는 계절을 따라 꽃을 피우고 그 잎을 무성히 하며 더욱 크게 자랄 것이다. 마치 이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우리들의 매일매일의 희망이 자라나듯.
국립 9.11 박물관은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타 부지에 건립되었으며 투윈타워 남쪽과 북쪽에 각각 놓인 기념물 “부재의 반영(Reflecting Absence)” 사이에 있다. 9.11 기념관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면 박물관은 그 역사를 진술, 기록, 교육하며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의 영향을 검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박물관은 주위의 건물들에 비하여 낮은 높이로 전면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전체적 모양을 추측하기 어려운 뾰족하며 기하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물 외벽은 반사가 되는 유리와 금속으로 제작되어 있고 표면이 줄무늬로 디자인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와 재질 등의 조합은 마치 무너져 내린 투윈타워의 일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 9.11박물관의 파빌리온을 설계한 노르웨이계의 건축회사 스노헤타( Snøhetta)는 기존의 세계무역센터 잔재를 살리는 것이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박물관의 입장은 다른 박물관과 기념관보다 엄격하였다. 마치 공항과 같은 보안 검색대를 거쳐 입장하면 곧바로 긴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지하전시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에스켈레이터의 한쪽에는 두 개의 커다란 삼지창의 모습을 한 철제 기둥이 서 있는데 이는 기존의 트윈타워 북쪽 건물 앞쪽에 위치하던 지지 구조물의 일부로 이 박물관의 공간이 같은 현장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을 하고 있는 박물관 내부는 마치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동굴 형태의 깊은 무덤 터를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안내자는 현장 유물들의 보존을 위하여 어두운 조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는데 그외에도 이 공간이 실제 많은 희생자의 희생장소이며 미확인된 사체가 안치된 공간이기도 한것을 생각할때 어둠이 그 경건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더욱 조성하였다.
9.11 테러가 일어나기 몇십 분 전인 오전 8시 30분의 무역센터의 전경을 담은 사진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두운 굴다리와 같은 이길에는 사건당시 실종자들을 찾는 포스터들을 담은 이미지들이 벽과 기둥 등에 투사되고 있는데 실종자의 사진과 특징 등 애절함이 담긴 가족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각자의 포맷으로 작성된 어수선한 포스터들은 소리가 없는 이미지일 뿐인데 마치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애타는 가족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서로의 음성들이 복잡하게 얽혀 환청으로 들리는 듯하다. 이 길을 지나면 천장이 높은 뚫린 공간을 위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이곳이 본격적 박물관 내부이다.
이 박물관의 기획은 내용에 있어 보존(preservation), 기념(commemoration), 교육(education), 고무(inspiration)의 네 가지를 목표로 진행되었고 이는 장소 자체가 유물인 이 공간 내에서 체계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박물관의 가장 깊은 공간으로 내려가기 위한 수직적 공간이동의 자리에는 오래되고 부서진 계단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계단은 예전 수많은 생존자가 이 계단을 이용하여 탈출하였다 하여 “생존자의 계단 (Survivors’ Staircase)” 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는 “방어벽 (Slurry Wall)” 과 “마지막 기둥 (Last Colum)” 과 함께 몇몇 중요한 기존부지의 잔재로 기억되는 것으로 이처럼 보전되어 박물관 건립 시 옮겨져 이곳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지난 달의 글에서 언급하였던 기념관의 최하부, 수많은 눈물이 모아 떨어진 그곳을 박물관 안에서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그들이 있었다. 2,983명의 희생자. 북쪽 기념관의 하단에는 사건의 역사적인 자료를 담은 전시실이 있고 남쪽 기념관의 하단에는 각 희생자의 개인적 기록을 담은 전시실이 있다. 특별히, 기념 전시인 “…를 기리며 ( In Memoriam)”의 전시관에 들어서는 순간 빼곡한 희생자의 사진들이 나를 압도한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었을, 아버지고 어머니였을, 어쩌면 내 이웃사촌이었을 익숙해 보이는 얼굴들을 만난다. 그런데 그 얼굴들이 이 벽에서 저 벽으로 사방에 너무나 빽빽하게 많아 순간 참아왔던 눈물이 터진다. 전시장에는 또한 각 희생자의 자료들을 담은 터치 테이블이 있는데 희생자를 찾아 클릭할 수 있다.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슨 공부를 했고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가족은 누구이며 친구와 가족들이 얼마나 그/그녀를 사랑했는지까지 사진, 음성 등을 통해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각 희생자의 죽음이 아닌 그들의 삶을 이렇게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개인적인 방법으로 기념하고 있었다.
북쪽기념관 전시장과 남쪽기념관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메모리얼 홀에는 하늘을 닮은 푸른 타일들이 붙어 있는 거대한 벽이 있다. 제목이 “그 9월 아침 하늘의 색을 기억하려고(Trying to remember the color of the sky on that September Morning)” 인 이 작업은 제목에서 설명하듯 9월 11일 당일 각기 다른 하늘의 모습을 그린 푸른 수채화이다. 아티스트 스팬서 핀치 (Spencer Finch)는2,893명의 희생자를 각각의 하늘의 모습으로 반영하여 그들을 기념하고 있다. 이 벽의 뒤에는 9.11 사태 시 수습되지 못한 미확인된 희생자들이 안치되어 있기에 어쩌면 가장 큰 아픔의 공간을 가장 아름답고 시적으로 기념하여 장식하고 있다는 생각하였다. 또한 이 벽에는 로마의 시인 버질의 아이네이스( Virgil’s Aeneid)로부터 인용한 문구 “어느 날도 당신을 그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지울 수 없습니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he time)” 가 적혀있다. 아티스트 톰 조이스 (Tom Joyce)는 세계무역센터에서 발견된 상처나고 구겨진 강철 조각들을 다시 열을 가하고 두드리고 접는 단조의 과정을 통해 강철 조각들을 희망과 아름다움을 담는 문자로 제 탄생시켰는데 각 문자는 대략 100파운드 정도의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제작 과정과 결과물은 이 쉽지 않은 역사적인 상처를 들춰내어 기록하고 매만져 돌보는 과정이 결국은 연단의 과정이 되어 무겁지만 더 단단하게, 우리에게 희망과 약속의 메시지를 안겨주는 역사로 거듭남을 상징하는듯하다.
수많은 희생을 담은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픔과 슬픔 심지어 분노가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경험한다. 그러나 박물관을 떠날 때 나는 더는 슬픔에 갇혀있지 않은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한 비극의 상황 속에 발현된 인류애를 보았고 지켜야 할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의 동굴과 같이 생각되었던 국립 9.11 박물관은 사실은 부활의 동굴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를 다시 자각게 하고 변하게 하는 공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어두운 지하 박물관에서 올라와 바라본 기념공원에는 이러한 나의 변화를 반기는 것이 있지 않은가. 기념공원에 심어진 “생존자 나무(Survivor Tree)”. 새로 심어진 400여 그루의 나무들과 함께 생존자 나무는 계절을 따라 꽃을 피우고 그 잎을 무성히 하며 더욱 크게 자랄 것이다. 마치 이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우리들의 매일매일의 희망이 자라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