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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의 눈으로 본 조지 워싱턴의 마운트 버논과 노예 된 사람들의 기념관
(George Washington’s Mount Vernon and the Enslaved People’s Memorial)


워싱턴 디시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32-1799)의 이름을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수도 이름으로 워싱턴이 쓰인 것은 물론이며 디시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고도로 위치하는 워싱턴 모뉴먼트와 유명대학 중 하나인 조지 워싱턴 대학, 그리고 포토맥강 주변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조지 워싱턴 기념 파크웨이 등 그를 기념하는 것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디시에서 포토맥강을 따라 조지 워싱턴 파크웨이를 타고 남쪽으로 15 마일가량 내려가면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22살부터 67세로 서거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마운트 버논 (Mount Vernon)을 방문할 수 있다. 마운트 버논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그의 가족이 거의 45년간 거주한 그의 고향으로 현재는 버지니아 포토맥강가에 500에이커의 커다란 농장 대지 위에 그의 저택과 부대시설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강가를 내려다보는 절경을 가진 언덕에 위치한 저택은 미망인이 된 그의 형수로부터 1754년 대여할 시에는 작고 소박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후 1758년과 1775년 두 번에 걸친 공사로 워싱턴의 취향을 반영한 넓은 저택으로 재탄생하였다. 이중 특별히 포토맥강을 바라보고 있는 저택의 동쪽 면에 기둥이 많은 넓은 공간 (Piazza and Colonnades)을 만들었는데 워싱턴 가족은 이곳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의 이 공간은 일직선으로 나무의자를 쭉 놓아 방문객들이 앉아 포토맥강을 내려다 보며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저택은 붉은 지붕의 이층건물로 지붕의 한가운데에는 올리브 잎을 문 금색 비둘기 모양의 바람개비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워싱턴 대통령의 평화를 향한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이 저택의 양옆으로는 하인들이 머무는 공간과 부엌이 연결되어 있다. 또한, 전 농장 곳곳에 대장간, 방앗간, 세탁소, 직조소, 증류소, 소금 창고 등의 작은 건물들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정원을 비롯하여 식자재 텃밭과 작은 과수원, 그리고 축사 등을 농장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대지주로서의 삶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많은 인력에 의해 유지된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운트 버논에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영부인 마사 워싱턴 (Martha Washington)의 무덤이 있다. 워싱턴 대통령의 유언대로 시신은 사후 이장된 것으로 앞쪽 대리석의 관 안에 워싱턴 부부가 안치되어 있고 그 뒤쪽에는 23명의 가족이 가족묘의 형태로 안치되어 있다.
워싱턴 대통령의 묘를 지나 포토맥강 쪽으로 내려가면 또 다른 무덤을 발견할 수 있다. 마운트 버논에서 일하던 노예들의 무덤이다. 안내표지를 보고 찾아간 그곳에는 숲이 우거진 가운데 윗부분이 어슷하게 잘린 원통형의 조각이 있는 기념관이 있었다. 이 기념관은 1929년 마운트 버넌 여성 연합 (The Mount Vernon Ladies’ Association)에 의해 처음 발족된 작은 기념관이었으나 지금의 모습으로 1983년 재건축된 것이다. 하워드 대학교의 건축학도들이 디자인한 기념관은 작은 원형의 광장에 예전 노예의 삶에 그들이 의지하였던 성경의 단어인 “사랑”, “소망”, “믿음”을 돌에 새기고, “미완성된 삶 (life unfinished)”을 나타내는 회색의 잘린 화강암 기둥을 중앙에 두었다. 담담히 이 기념 조형물을 보고 돌아서는 이때 나는 기념관을 둘러싸고 있는 숲속 여기저기서 시들고 있는 꽃다발을 발견했다. 앗! 이건 뭐지...?

꽃다발을 향해 다가간 나는 꽃다발을 중심으로 땅 위에 실로 표시된 직사각형을 발견한다. 순간 나는 이 직사각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고 그 옆을 둘러본다. 그 옆에 또 그 옆에 저쪽 언덕을 넘어 보이지 않는 그곳에도 있는 시들어가는 꽃다발과 실 직사각형. 이곳은 마운트 버논에서 노예의 삶을 마친 이들이 묻혀 있는 곳이었다. 꽃다발과 실의 표시가 아니면 어떠한 작은 비석이나 봉분도 발견할 수 없다. 그저 평평한 땅 밑에 그들이 묻혀있는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언덕에는 100-150여 명 정도가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시체의 매장은 다리가 동쪽 강가를 향해 묻혔으며 이는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이루지 못한 희망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조지 워싱턴은 11세 때 아버지로부터 11명의 노예를 물려받았고, 마운트 버논에서는 적어도 577명의 노예가 살고 일하였다고 한다. 마운트 버논의 도널드 레이놀즈 뮤지엄 교육센터 (The Donald W. Reynolds Museum and Education Center)에서는 워싱턴의 삶을 기록하는 전시와 함께 “마운트 버논의 노예 된 사람들 (Enslaved People of Mount Vernon)”이라는 전시가 함께 이루어 지고 있다. 이 두 전시가 함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또한 이 전시들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부여한 상태를 나타내는 “노예 (Slave)”라는 단어 대신 그들의 인간성을 강조한 “노예 된 사람들 (Enslaved People)”이란 존엄한 표현을 배웠다. 전시 “마운트 버논의 노예 된 사람들”은 예전 스미소니언 초상화 갤러리에서 만난 플로라 (Flora)의 초상화를 기억나게 한다. 작자미상의 이 초상화는 판매 명세서에 판매의 대상인 플로라의 모습을 어떠한 디테일도 없이 단지 그녀의 실루엣을 누런 종이를 오려 표현한 것으로 그 초상화의 표현 방법에서 플로라라는 한 인간을 다루는 거칠고 낮은 태도를 읽으며 나는 충격에 싸였었다. 그 태도는 슬프게도 이곳 마운트 버논의 서쪽 언덕에서 낮게 묻힌 그들의 모습에서도 발견되었고 또한 2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역사에서도 누군가의 무릎에 짓눌려 질식사한 다른 조지(George)의 모습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이런 역사를 뒤돌아보며 객관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역사 속 과오와 이를 개선하려 했던 수많은 노력을 다시 한번 짚어보며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인간애를 다시 한번 불러내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마운트 버논에서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이.

조각가의 눈으로 본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기념관
(Franklin Delano Roosevelt Memorial)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거나 오랜 기간 고생한 희생자가 있는가 하면 감염 예방과 확산방지를 위하여 실시되고 있는 격리조치 등에 의해 위축된 경제로 우리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미국 내 실업률이 대공황 이후 최고치를 보이는 가운데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미국에서는 경기부양책으로 코로나 지원금을 국민에게 일괄지급하는가 하면, 소상인 융자, 실업수당 특별 지원금 등 나름의 구제정책을 내놓고 있고 또 각 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맥락의 팬데믹 구제정책을 마련하여 실행하고 있는 와중 얼마 전 한국에서는 경기회복을 위하여 ‘한국판 뉴딜’을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뉴 딜(New Deal)은 미국에서 대공항으로 침체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하여 1933년부터 1936년에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에 의하여 실행된 경기부양책이다. 이는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복지를 포함한 경제구조를 개혁하여 미국의 대공황 타계와 경제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획을 긋는 성공한 경제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본적인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선상에서 경제적 위기의 상황에 정부의 적절한 개입과 지원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 딜(New Deal)” 정책은 지금과 같은 세계적 경제적 위기상황에서 참고하기 적절한 선례가 됨이 틀림이 없다. 이러한 정책을 실시한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대통령에 관한 궁금함과 함께 워싱턴 디시에 위치한 그의 기념관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워싱턴 디시의 인공호수인 타이들 베이슨(Tidal Basin)에 위치한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기념관은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기념관 사이에 놓여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제 32대 대통령으로 대공황시기에 뉴딜정책을 추진하여 경제공황을 극복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를 이끈 지도자로 그 업적이 요약된다. 그의 기념관은 마치 호숫가를 따라 조성된 공원과 같이 평평한 대지 위에 수많은 꽃과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 산책로를 따라 누구나 편안하게 접근하여 돌아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헌정된 기념관은 7.5에이커라는 넓은 대지에 조성되었다. 바닥과 구조들은 붉은색이 도는 사우스 다코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는데, 기념관 전체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남긴 수많은 문장이 이 화강암벽에 새겨져 있었다. 가지지 못한 자를 배려하고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며 평화를 갈망하는 그의 인생과 정치철학을 그의 글들이 새겨진 기념관을 둘러보며 읽을 수 있었다.

기념관은 공모에서 선택된 조경 건축가 로렌스 할프린( Lawrence Halprin)에 의하여 디자인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4번을 연임하여 12년을 재직하였는데 기념관 공간을 5개의 야외 방으로 나누어 첫 번째 방을 프롤로그로 시작하여 나머지 4개의 방은 각각 4년의 임기를 나타내도록 디자인하였다. 각 방에는 은유적인 의미를 가진 폭포가 있는데 한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폭포는 더 크고 복잡해지고 이는 경제침체와 세계전쟁에 따른 늘어난 대통령의 역할을 대변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디자인이라고 설명한다. (안타깝게도 방문 시에는 기술적인 문제로 물이 흐르는 폭포는 볼 수 없었다) 기념관 중앙 부분에는 커다란 브론즈로 제작된 좌상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동상이 그의 애견과 함께 놓여 있었다. 영부인이었던 엘레노아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의 조각상도 볼 수 있는데 역대 대통령 기념관 중 유일하게 영부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영부인은 유엔의 첫 번째 미국 대표라는 설명과 함께 입상으로 제작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쟁을 혐오하고 하나의 국가만의 노력이 아닌 국가들 간의 협력을 통한 평화를 강조하는 대통령 부부 각자의 노력을 반영한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성인이 되어 앓게 된 소아마비로 인하여 장애를 갖게 되어 임기 내내 휠체어 생활을 하였다. 루스벨트 기념관은 이러한 대통령의 배경을 고려하여 다양한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기념관을 만들려 노력하였다고 한다. 전 기념관을 휠체어 접근이 용이하게 만들었고, 기념관 조각 중에도 시각장애인을 배려한 만져 볼 수 있고 점자가 새겨진 조각이 있다. 조각가 로버트 그래함( Robert Graham)이 1997년 제작한 “소셜 프로그램 (Social Programs)”이 그것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에 따라 시작된 54개의 프로그램을 작업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5개의 브론즈 패널과 5개의 기둥을 제작하였는데 각각 6피트 x 6피트 (180센티) 인 커다란 패널에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작업자들의 손과 얼굴을 배경으로 넣고 각 프로그램의 이미지를 부조로 제작하였다. 또한 그 프로그램의 이름을 점자로 새겨 놓았다. 롤러와 같은 산업인쇄기로 설명되는 5개의 원기둥에는 음각으로 이 이미지들과 점자들이 새겨있다. 이 작업은 시각장애인들이 만져볼 수 있는 의도로 제작되었는데 실제로 관람한 작업에서는 이 역할이 어려우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작업이 생각보다 높게 위치하여 전체를 만져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며 시각장애인들이 이용하는 점자는 손끝의 감각에 맞추어 훈련될 수 있도록 한가지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이 작업의 점자는 그 코드는 빌렸으나 그 크기와 점의 간격이 다르기에 시각장애인들이 이를 만져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 아닌 일반 관람자에게는 만져볼 수 있도록 이미지와 점자를 함께 사용하여 장애인을 배려한 작업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
대공황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는 시민들을 묘사한 조각가 조지 시걸 (George Segal)의 작품이 오랫동안 나를 붙들었다. 조지 시걸은 석고붕대를 이용하여 실제 인물을 떠내는데 이것을 본 주물을 위한 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다시 붙여 속이 비어있는 거친 표면의 인물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은 석고붕대의 표면을 통해 실제의 모습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어느 정도의 익명성을 갖게 되는데 루스벨트 기념관에서 본 그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브론즈로 마무리되었고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있는 농부 부부의 모습과 빵 배급을 줄 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모습의 조각상이다. 어쩌면 약간은 유령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절망과 힘겨움을 가진 그 누구인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그 속에서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기다림의 줄이 6피트의 사회적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 이 조각의 벽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복지 정책의 근본 철학이 담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우리의 발전의 여부는 많이 가진 자에게 많은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충분하게 제공하는가에 있다. (The test of our progress is not whether we add more to the abundance of those who have much; it is whether we provide enough for those who have too little.)’

미국 사회에서 “가진 자” 흔히 말하는 “엄친아”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념관에서 나는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빈곤층, 여성 등을 만났다. 인종과 관련된 부분은 이 글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기념관의 곳곳에서 이에 관한 화합과 협력의 메시지 또한 발견하였다. 대공황으로부터 한 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우리는 글로벌 팬데믹속에서 매일의 삶과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또 하나의 공황을 맞이하고 있으며 이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익에 날이 서 있다. 이러한 때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의 선례를 돌아보는 것은 적어도 이 상황 극복에 대한 해답의 일부를 제시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에서이다. 어려움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며 서로 협력하여 일어설 때 우리 사회 전체는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올바른 가치관과 정치 철학을 가진 리더쉽이 절실히 요구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나를 포함한 각각의 개인의 자각이 먼저임을 깨달으며 나는 나 자신에게 “김현정판 뉴딜” 프로젝트를 지금 나의 위기의 삶 속에 진행해 보기로 한다. 여러분도 각자의 뉴딜을 같이 해보지 않겠습니까?

조각가의 눈으로 본 국립 9.11 박물관

국립 9.11 박물관은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타 부지에 건립되었으며 투윈타워 남쪽과 북쪽에 각각 놓인 기념물 “부재의 반영(Reflecting Absence)” 사이에 있다. 9.11 기념관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면 박물관은 그 역사를 진술, 기록, 교육하며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의 영향을 검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박물관은 주위의 건물들에 비하여 낮은 높이로 전면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전체적 모양을 추측하기 어려운 뾰족하며 기하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물 외벽은 반사가 되는 유리와 금속으로 제작되어 있고 표면이 줄무늬로 디자인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와 재질 등의 조합은 마치 무너져 내린 투윈타워의 일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 9.11박물관의 파빌리온을 설계한 노르웨이계의 건축회사 스노헤타( Snøhetta)는 기존의 세계무역센터 잔재를 살리는 것이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박물관의 입장은 다른 박물관과 기념관보다 엄격하였다. 마치 공항과 같은 보안 검색대를 거쳐 입장하면 곧바로 긴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지하전시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에스켈레이터의 한쪽에는 두 개의 커다란 삼지창의 모습을 한 철제 기둥이 서 있는데 이는 기존의 트윈타워 북쪽 건물 앞쪽에 위치하던 지지 구조물의 일부로 이 박물관의 공간이 같은 현장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을 하고 있는 박물관 내부는 마치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동굴 형태의 깊은 무덤 터를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안내자는 현장 유물들의 보존을 위하여 어두운 조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는데 그외에도 이 공간이 실제 많은 희생자의 희생장소이며 미확인된 사체가 안치된 공간이기도 한것을 생각할때 어둠이 그 경건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더욱 조성하였다.

9.11 테러가 일어나기 몇십 분 전인 오전 8시 30분의 무역센터의 전경을 담은 사진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두운 굴다리와 같은 이길에는 사건당시 실종자들을 찾는 포스터들을 담은 이미지들이 벽과 기둥 등에 투사되고 있는데 실종자의 사진과 특징 등 애절함이 담긴 가족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각자의 포맷으로 작성된 어수선한 포스터들은 소리가 없는 이미지일 뿐인데 마치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애타는 가족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서로의 음성들이 복잡하게 얽혀 환청으로 들리는 듯하다. 이 길을 지나면 천장이 높은 뚫린 공간을 위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이곳이 본격적 박물관 내부이다.
이 박물관의 기획은 내용에 있어 보존(preservation), 기념(commemoration), 교육(education), 고무(inspiration)의 네 가지를 목표로 진행되었고 이는 장소 자체가 유물인 이 공간 내에서 체계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박물관의 가장 깊은 공간으로 내려가기 위한 수직적 공간이동의 자리에는 오래되고 부서진 계단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계단은 예전 수많은 생존자가 이 계단을 이용하여 탈출하였다 하여 “생존자의 계단 (Survivors’ Staircase)” 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는 “방어벽 (Slurry Wall)” 과 “마지막 기둥 (Last Colum)” 과 함께 몇몇 중요한 기존부지의 잔재로 기억되는 것으로 이처럼 보전되어 박물관 건립 시 옮겨져 이곳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지난 달의 글에서 언급하였던 기념관의 최하부, 수많은 눈물이 모아 떨어진 그곳을 박물관 안에서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그들이 있었다. 2,983명의 희생자. 북쪽 기념관의 하단에는 사건의 역사적인 자료를 담은 전시실이 있고 남쪽 기념관의 하단에는 각 희생자의 개인적 기록을 담은 전시실이 있다. 특별히, 기념 전시인 “…를 기리며 ( In Memoriam)”의 전시관에 들어서는 순간 빼곡한 희생자의 사진들이 나를 압도한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었을, 아버지고 어머니였을, 어쩌면 내 이웃사촌이었을 익숙해 보이는 얼굴들을 만난다. 그런데 그 얼굴들이 이 벽에서 저 벽으로 사방에 너무나 빽빽하게 많아 순간 참아왔던 눈물이 터진다. 전시장에는 또한 각 희생자의 자료들을 담은 터치 테이블이 있는데 희생자를 찾아 클릭할 수 있다.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슨 공부를 했고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가족은 누구이며 친구와 가족들이 얼마나 그/그녀를 사랑했는지까지 사진, 음성 등을 통해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각 희생자의 죽음이 아닌 그들의 삶을 이렇게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개인적인 방법으로 기념하고 있었다.

북쪽기념관 전시장과 남쪽기념관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메모리얼 홀에는 하늘을 닮은 푸른 타일들이 붙어 있는 거대한 벽이 있다. 제목이 “그 9월 아침 하늘의 색을 기억하려고(Trying to remember the color of the sky on that September Morning)” 인 이 작업은 제목에서 설명하듯 9월 11일 당일 각기 다른 하늘의 모습을 그린 푸른 수채화이다. 아티스트 스팬서 핀치 (Spencer Finch)는2,893명의 희생자를 각각의 하늘의 모습으로 반영하여 그들을 기념하고 있다. 이 벽의 뒤에는 9.11 사태 시 수습되지 못한 미확인된 희생자들이 안치되어 있기에 어쩌면 가장 큰 아픔의 공간을 가장 아름답고 시적으로 기념하여 장식하고 있다는 생각하였다. 또한 이 벽에는 로마의 시인 버질의 아이네이스( Virgil’s Aeneid)로부터 인용한 문구 “어느 날도 당신을 그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지울 수 없습니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he time)” 가 적혀있다. 아티스트 톰 조이스 (Tom Joyce)는 세계무역센터에서 발견된 상처나고 구겨진 강철 조각들을 다시 열을 가하고 두드리고 접는 단조의 과정을 통해 강철 조각들을 희망과 아름다움을 담는 문자로 제 탄생시켰는데 각 문자는 대략 100파운드 정도의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제작 과정과 결과물은 이 쉽지 않은 역사적인 상처를 들춰내어 기록하고 매만져 돌보는 과정이 결국은 연단의 과정이 되어 무겁지만 더 단단하게, 우리에게 희망과 약속의 메시지를 안겨주는 역사로 거듭남을 상징하는듯하다.

수많은 희생을 담은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픔과 슬픔 심지어 분노가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경험한다. 그러나 박물관을 떠날 때 나는 더는 슬픔에 갇혀있지 않은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한 비극의 상황 속에 발현된 인류애를 보았고 지켜야 할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의 동굴과 같이 생각되었던 국립 9.11 박물관은 사실은 부활의 동굴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를 다시 자각게 하고 변하게 하는 공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어두운 지하 박물관에서 올라와 바라본 기념공원에는 이러한 나의 변화를 반기는 것이 있지 않은가. 기념공원에 심어진 “생존자 나무(Survivor Tree)”. 새로 심어진 400여 그루의 나무들과 함께 생존자 나무는 계절을 따라 꽃을 피우고 그 잎을 무성히 하며 더욱 크게 자랄 것이다. 마치 이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우리들의 매일매일의 희망이 자라나듯.

조각가의 눈으로 본 국립 9.11기념관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트윈타워가 무너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당시 맨해튼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던 나는 그 전날인 9월10일 저녁에 오빠가 있는 댈러스로 출발하였는데 그날 저녁에 비가 몹시 내려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2시간 이상을 지체하였다. “내리고 싶다…” 고 불평을 하며 댈러스에 늦게 도착하였고 자고 일어나 켠 아침 뉴스에 생중계되고 있던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며 나는 되뇌었다. ‘나도 저 가까이 있었겠구나…’

수많은 주위의 친구들이 희생되었고, 몇몇 사람을 건너면 다 알게 되는 희생자 가족들의 소식은 이러한 테러를 통한 희생이 저 먼 나라의, 또는 저 옛날의 이야기가 아닌 내 친구, 내 가족의 일이 될 수 있음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 상처는 지금도 주위에 잊히고 있지 않아 막상 9.11 기념관을 방문한다는 것은 다른 기념관을 방문하는 것보다 심적 부담감이 많이 있었다.
자료들을 통해 그리고 많은 지인의 방문기를 통해 9.11 기념관이 어떠한 모습으로 지어졌는지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방문하여 경험한 기념관은 어떠한 사진과 설명도 담아낼 수 없는 감동과 아픔을 주었다.

국립 9.11 기념관은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타 부지에 기존 부지의 반 정도의 크기인 8에이커 정도로 지워졌다. 2001년 9월 11일 테러 이후 당시 희생자인 2,977명과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테러의 희생자 6명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관 건설을 계획하였다. 기념관 디자인은 공모를 통해 5,200대 1의 경쟁을 뚫고 이스라엘 출신 미국인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 (Michael Arad)의 “부재의 반영(Reflecting Absence)”이 선발되었는데 그는 조경건축가인 피터 워커 (Peter Walker)와 함께 이후 작업하게 된다. 기념관은 테러 10주기를 맞는 2011년 9월 11일에 헌정되고 이후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마이클 아라드는 테러로 붕괴된 두 개의 쌍둥이 건물이 서 있던 자리 각각에 거대한 정사각형의 공간을 파내어 기념관을 만드는 것을 디자인하였는데 그는 그 비어진 공간을 통해 상실과 부재를 공명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방문한 기념관은 북쪽 건물과 남쪽 건물이 위치하던 곳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크기(4046 m2)로 정사각형의 모양이 음각으로 파여져 있으며 그 구조의 안쪽 면은 검은색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커다란 정사각형 공간 가운데에는 다시 이중으로 작지만 더 깊은 듯 보이는 음각 정사각형이 있다. 첫 번째 커다란 정사각형 구조의 안쪽벽면을 따라 잔잔한 폭포와 같이 물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이물은 바닥에서 잠시의 수평 이동 후 다시 작은 정사각형 안으로 빠르게 흘러내린다. 이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참으로 묘한 경험을 하게 하였다. 절대주의자(Suprematist)인 말레비치(Malevich)는 그의 검은 정사각형을 어떠한 재현도 거부한 순수한 형태로 단지 존재만을 부여하였다 주장하였다. 말레비치의 검은 정사각형과 같은 이 기념관은 철저히 비어져 그 존재의 부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구조물을 둘러싸고 빼곡히 새겨진 희생자의 이름은 그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이름들로부터 시작된 듯한 물줄기는 희생자들의 또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의 이야기가 담긴 눈물인 듯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떨어지던 눈물은 잠시 평정을 찾는 듯하였으나 어느새 또 다른 부재를 향하여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그 부재의 공간은 너무나 시커멓고 멀어서 그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리 발돋움하여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눈물의 물줄기는 그 죽음의 나락과 같은 깊은 부재의 구멍으로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이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과 아픔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다.

9.11 기념관에서 경험하는 부재(Absence)는 예전 디아 비컨( Dia Beacon)에서 경험한 대지예술가 마이클 하이저 (Michael Heizer)의 작업 <북, 동, 남, 서 (North, East, South, West) , 1967/2002>의 부재의 경험과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큰 스케일로 유기적 풍경 속에 둠과 동시에 두려움을 경험하게 할 만큼 커다란 빈공간을 경험케 한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그 의미적인 면에서 9. 11 기념관에서 부재의 경험은 영국의 조각가인 레이첼 화이트리드 (Rachel Whiteread)의 음의공간 (Negative Space)과 더 유사하다. 화이트리드는 존재의 바깥 부분을 캐스팅의 방법을 통해 떠냄으로 비어진 공간을 드러내고 이를 통하여 실제 존재를 인식게 하는데 “역 기념물(Counter Monument)”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인 <홀로코스트 기념물( Holocaust Memorial), 2000>이 그러하다. ‘무명의 도서관 (Nameless Library)’ 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기념물은 무한 반복적으로 쌓인 책들의 선반을 떠내어 만들어진 구조물로 이 책들은 수많은 유대인 희생자를 상징하며 책들은 안쪽으로 꽂혀 떠내어졌는데 이는 희생자들의 익명적 죽음을 나타낸다. 떠내어진 음의 공간을 통해 더는 보이지 않는 희생자들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있어 9.11 기념관의 음의 공간인 부재의 공간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9.11 기념관은 많은 기념관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모아 만들어진 기념관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정사각형의 기념물 주위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브론즈 판에 뚫려 새겨있고 이 이름은 밤에는 조명으로 빛나며 그 배열은 참관자를 배려하여 가족관계와 직장 동료들을 같이 배열하는 것까지 세심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방문 시 몇 송이의 흰 장미가 드문드문 이름에 꽂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생일을 맞은 희생자의 이름에 놓인 장미였다. 베트남 전쟁 기념관에서와같이 희생자의 이름은 만져지고 공유하는 기념관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투윈타워 남쪽과 북쪽에 놓인 각각 놓인 기념물 사이에 부지 내의 현장 유품 등이 전시된 박물관이 있는데 이 박물관은 기념관 공원 지하 전체를 차지하며 기념관을 보며 궁금하였던 많은 점을 설명해 준다. (박물관에 대한 내용은 다음 달로 이어집니다.)


조각가의 눈으로 본 알링턴 국립묘지 무명용사의 묘 기념관
( The Tomb of the Unknown Soldier Memorial in Arlington National Cemetery)


워싱턴디시에서 포토맥강을 건너 버지니아쪽에 바로 위치한 알링턴 국립묘지는 남북전쟁이후 미국이 참여했던 전쟁에서의 전사자 및 참전자, 대통령등의 국가 공헌자들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이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품위 있고 명예로운 모습으로 미군과 그들의 가족을 영면케 하며 존경과 위로로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미션으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1864년 남북전쟁 전사자를 처음 매장한 것을 시작으로하여 지금도 일요일과 국정 공휴일을 제외한 매일 장례가 행해지며 하루 첫 장례의 시작 30분전 조기를 계양하고 마지막 장례 30분후 국기를 내림으로 그 조의를 표한다. 메리 커스티스 리(Mary Custis Lee)의 개인 소유지인 알링턴하우스로 부터 시작한 알링턴 국립묘지는 현 624에이커의 넓은 부지를 가지고400,000명 이상이 이곳에 영면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 확장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최근 둘러본 기념관중 가장 많은 생명을 담고 이를 기리고 있는 곳이 알링턴 국립묘지였다. 다른 기념관과 달리 신분증 확인과 일련의 보안검색을 통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입장한 국립묘지안에는 모든 것들이 절도있고 경건한 인상을 주었다. 똑같은 모습을 한 희고 작은 직사각형모양의 비석은 마치 도미노를 연상시키며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서 있었고 그 가늠 할 수 없이 많은 저 비석의 숫자가 곧 죽음의 숫자와 같다는 생각을 하니 순간 머리가 쭈뻣 서 올랐다. 무덤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자 마치 미니멀리스트의 작품같이 기하학적이고 중성적인 형태의 각 비석들은 점차 너무나 개인적인 모습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약간은 둥근 머리를 한 비석의 맨 윗 줄은 그들을 추모하는 십자가 등의 종교적 심볼이 새겨져 있고 그 다음으로는 묘 주인의 이름, 출신, 직위, 참전지, 출생과 사망년일등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클리포드씨, 한국전에 참전하여 저희 나라를 도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메리 할머니, 남편을 전쟁에서 잃으시고 오랜기간 얼마나 많이 슬프셨습니까?” , “ 아가야, 태어난지 이틀만에 하늘로 가야 했다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구나.”… 생면부지의 방문객인 나에게도 각 비석에 적힌 내용은 그들이 낯선 존재가 아닌 마치 옆집 이웃과 같이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인격체로 받아들이기에 충분케 하였다. 예전 베트남전 기념관을 방문하였을때 기념물에 새겨진 작은 이름 하나를 마치 그리운 그/ 그녀를 만지든 어루만지며 그리워 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일정하게 놓여진 이 비석들이 만들어 내는 각 무덤의 공간에서 가족과 지인들이 느꼈을 위로와 소통을 약간은 짐작하여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수 많은 비석들을 지나 알링턴 국립묘지의 중간지점쪽으로 가다보면 “무명용사의 묘” 라는 푯말을 보게 된다. 무명용사? 전쟁에서 희생의 성격에 따라 그 신분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는 상황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기에 사실 무명용사가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순간 드는 생각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름없는 그들을? 지금 지나온 수 많은 비석의 주인공들은 그래도 이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보전하고 있었는데, 이름이 없이 사라져 버린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기념할 수 있는가?’

무명용사의 묘 기념관은 포토맥강가를 건너 워싱턴디시를 내려다 보는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길이가 4미터 정도의 커다란 직사각형 궤의 모양을 한 무명용사의 묘 기념물은 콜로라도 율 마블로 제작되었다. 그 수많은 무명 용사를 감당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 슬픔의 총체적 무게를 담은 것인지 기념물은 79톤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게를 하고 있다. 기념관은 제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에서의 무명용사의 시신 한 구씩을 매장한 묘위에 세워졌는데 실제 직사각형의 기념물은 무덤의 머리쪽인 1차 세계대전 무명용사의 무덤위에 세워 졌으며 기념물의 서쪽벽을 바라보고 있을때 왼쪽으로 부터 한국전, 베트남전, 2차 세계대전 무명 용사의 무덤이 차례로 위치한다. 이는 공모전에 뽑힌 건축가 로리머 리치(Lorimer Rich) 의 디자인으로 조각가 토마스 허드슨 존스(Thomas Hudson Jones)가 제작하였으며 1932년에 완성되어 공개되었다. 4단의 7조각으로 만들어진 기념물은 워싱턴디시쪽인 동쪽벽에는 평화, 승리, 용기를 나타내는 그리스 양식의 조각이 있고 긴 벽인 남쪽과 북쪽벽에는 각각 3개의 화관이, 그리고 관람객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서쪽 벽 중앙에는 “이곳에 오직 신만이 아는 명예로운 미국 군인이 잠들다. ( HERE RESTS IN HONORED GLORY AN AMERICAN SOLDIER KNOWN BUT TO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무명용사의 묘에는 다른 묘역이 갖지 않은 것이 있다. 기념물의 서쪽 벽 앞쪽으로 검정색의 얇고 긴 직선 리본형태의 매트가 깔려져 있는데 이 매트는 이 묘역을 지키는 군인들의 동선을 표시한 것이다. 이 묘역에만 진행되는 경비는 1937 년 이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365일 24시간 진행되며 매 시간 그 경비를 교체한다고 한다. 엄격한 훈련과 심지어 신체조건까지 보는 심사를 통해 선택된 경비부대는 매 교체식마다 검정색의 선을 따라 21 발자국, 21초의 응시등 군대의 최고의 명예를 상징하는 21의 숫자만큼 정해진 규정을 따라 절도있는 교체식을 진행한다. 때마침 교체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식중에는 참관객의 움직임이나 대화마저 금지되어 있다. 철저히 훈련된 경비대의 모습은 그들이 지키고 있는 무명의 용사들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가치를 부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름이 없음에 자칫 지나쳐 버릴 수 있고 부서져 없어질 수 있었던 그 삶, 그러나 고귀한 목표를 위하여 희생된 그 삶이 누군가의 애통의 무게만큼의 무거운 기념물로 남겨지고 보호됨에 이제서야 무언가 모든것이 제대로 제 자리를 찾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참관자로서도 잔잔한 뿌듯함을 느꼈다.
존중받아야 할 것이 존중받은 느낌? 또한 이를 통해 위로받았고 받을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며 이번 방문은 기념관의 역할과 그 적절한 방법적 접근에 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조각가의 눈으로 본 미국 공군 기념관 (United States Air Force Memorial)

포토맥 강가를 따라 조지 워싱턴 파크웨이를 운전하다 보면 강을 사이에 둔 양쪽 하늘에 두 개의 뾰족한 것이 있다. 하나는 디시쪽에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Gorge Washington)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워싱턴 모뉴먼트 (Washington Monument)로 워싱턴디시 하늘 아래 가장 높은 554피트(169m)의 구조물이다. 높이에 비해 얇은 몸통과 상부가 마치 중심을 향하여 사면을 깍은 듯한데 연필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연필 탑이라는 예명을 갖고 있다. 다른 하나는 강 건너 바라보이는 알링턴에 위치하고 있는 미국 공군 기념관의 기념물로 끝이 뾰족하게 보이며 약간은 굽은 세 개의 거대한 금속의 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멀리서 무작정 이 조형물을 보고 가까이 운전하여 다가가 보았는데 이 기념관은 촬영과 접근이 금지된 미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 The Pentagon)을 바로 지나 알링턴 국립묘지( Arlington National Cemetery)와 인접한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미국 공군 기념관은 포토맥강 건너편 워싱턴 모뉴먼트를 포함하여 워싱턴디시 주요 부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비교적 한적한 알링턴 언덕 위에 위치한다. 높은 빌딩이 밀집한 알링턴의 다른 부분에 비해 주변 건물이 없고 펜타곤과 알링턴 국립묘지의 낮은 스카이라인 때문인지 유난히 공군기념관의 기념물은 하늘을 향하여 높이 솟은 느낌을 준다. 2006년 10월 16일 헌정된 공군 기념관 입구에는 전 공군 조종사이기도 하였던 조지 부시 대통령의 헌정사 일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 기념관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육군은 그가 싸웠던 전장을 걸을 수 있으며, 해군은 그가 점령했던 해변을 걸을 수 있다. 그러나 공군은 자유수호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가로질렀던 하늘을 찾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공군 남녀의 저 하늘 위에서의 업적과 희생을 기념기 위하여 이 지상의 공간을으로서 이 기념관을 그들에게 헌정한다. (SOLDIER CAN WALK THE BATTLE FIELDS WHERE HE ONCE FOUGHT; A MARINE CAN WALK THE BEACHES HE ONCE STORMED; BUT AN AIRMAN CAN NEVER VISIT THE PATCH OF SKY HE RACED ACROSS ON A MISSION TO DEFEND FREEDOM. AND SO IT’S FITTING THAT THE MEN AND WOMEN OF THE AIR FORCE HAVE THIS MEMORIAL, A PLACE HERE ON THE GROUND THAT RECOGNIZES THEIR ACHIVEMENTS AND SACRIFICES IN THE SKIES ABOVE.)”

미국 홀로 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 디자인으로 알려진 미국 건축가 제임스 인고 프리드(James Ingo Freed) 의 마지막 프로젝트였던 공군 기념관은 직사각형의 넓은 광장을 가지고 있다. 광장의 양쪽 끝에는 그간에 공군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담은 검은 화강암벽이 서 있고 남쪽 벽 가까이는 제노스 프루다키스(Zenos Frudakis)가 조각 한 미국 공군 명예 경비대를 대표하는 2.4m 높이의 청동 동상 4개가 서 있다. 멀리서 모두의 눈길을 끈 기념물인 세개의 호는 기념관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조형물 아래에 서면 언덕 밑으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펜타곤과 디시의 전망이 인상적이다. 기념물은 최고 지점 높이가 270 피트 (82m)이며 스테인레스 스틸 판으로 만들어진 구조로 하단 2/3은 고강도 콘크리트를 채우고 나머지 1/3은 비어 있다. 콘크리트와 빈속의 경계에는 작은 공 모양의 납을 무게가 1톤정도로 채워 넣어 구조물 안에서 구르게 하는 완충지대를 만듦으로 바람의 흔들림에 안전하게 제작되었다. 나는 조각가로서 중력에 반응하는 구조물의 안정성에 관심이 있으며 이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유심히 관찰한다. 거대한 호를 지면에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에 이러한 공학적 설명을 듣는 것은 굉장히 흥미롭다.

디자인은 공군 선더버즈(Thunderbirds) 의 비행운의 모습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공군 선더버즈의 비행은 일반적으로 4개의 비행체가 함께 비행하는데 예외적으로 하늘에서 실종된 동료를 기리는 장례식 비행에서는 실종된 동료의 위치를 비워둔 배열로 비행한다. 기념물에 세 개의 호는 이러한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세 개의 호가 각 120도의 각도를 가지고 배열되어 그들만의 회상의 연못인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이와 같은 디자인은 기념관의 북쪽에 세워져 있는 묵상의 유리 벽을 볼 때 더 잘 설명된다. 투명한5개의 유리판을 겹쳐 중앙에 서 있도록 제작된 이 벽은 유리판 양쪽 면에 4대의 F-16 비행기가 실종된 동료의 위치를 비워둔 배열로 비행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 비워진 공간은 어떠한 설명보다 그 존재를 절실히 표현하고 있었고 그 부재를 바라보는 관람자들이 느꼈을 감정은 내 심장의 조임으로 더이상 설명치 않아도 알수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다. 기념관이란 이제 더이상 보이지 않는 그것을 보이도록 하여 역사속에 간직하고자 하는 공간인데 그 공간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 그 존재를 보이게 한다니...

공군기념관에는 보통 기념관에 있는 물을 가둬 놓은 회상의 연못이 있지 않다. 눈을 들어 바라보는 하늘이 그들과 우리의 회상의 연못이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아 저 하늘로 치솟는 비행운처럼 미래의 꿈의 공간이기도 한 저 하늘 속에 우리의 삶도 상승하는 모습의 궤적을 남기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