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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의 눈으로 본 마틴 루터 킹 기념관 (Martin Luther King Jr. Memorial)

가을이 깊어가며 하늘이 유난히 파란 날 방문한 마틴 루터 킹 기념관(Martin Luther King Jr. Memorial)은 워싱턴디시의 타이달 베이슨(Tidal Basin)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다. 인공호수인 타이달 베이슨은 호수를 둘러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고 봄철 벚꽃축제 기간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호숫가를 산책한다. 마틴 루터 킹 기념관은 지난봄 몇 번 벚꽃놀이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가을 끝녁에 방문한 기념관에서는 무언가 모를 쓸쓸한 공기와 함께 거대한 돌산의 모습을 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모습이 강렬히 마음에 다가왔다.

마틴 루터 킹 기념관은 인간의 동등한 권리 특별히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권리 신장을 위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권운동을 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기념하기 위하여 2011년 건립되어 헌정되었다. 킹은 1950년 중반 시작된 흑인 인권문제를 가지고 1963년 링컨 기념관 앞에서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100년을 기념하듯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를 연설하였다. 그는 인종을 넘어선 화합과 평등한 권리를 강조하였고 이는 수많은 지지를 얻으며 미국 사회의 변화를 재촉하였다. 킹은 그 다음 해인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으나 1968 년 암살되었다. 마틴 루터 킹의 업적은 단순히 그가 흑인이었기에 흑인을 위한 인권의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인간 자체로 각자 존중되어야 할 것이며 이는 인종, 종교, 성별, 민족 또는 성적 취향 등과 같은 어떠한 조건과 무관하다는 인식을 우리에게 각인시켜주는 노력임에 의미를 둔다.

미국에서는 매년 1 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날로 기념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역사 수업에서는 킹 목사의 업적을 돌아보고 그의 행적을 주제로 한 미술대회나 작문대회를 열어 그 수상자를 뽑아 1 월 기념일에 전시 발표하기도 한다. 또한 “나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문을 여러 학생이 나누어 외워 릴레이 식으로 발표하고 때론 킹 목사가 연설한 링컨기념관 앞에 직접 찾아가 발표하며 그 의미를 되새긴다.

이와 같이 미국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인물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기념관은 그 의미를 반영하듯 독립선언문의 기초의원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의 기념관과 노예해방을 선언을 한 링컨의 기념관들을 연결하는 선상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기념관의 디자인은 그의 업적이 지닌 의미를 반영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공모하였고 수많은 지원 중 킹의 연설의 주요 부분을 실제로 구현한 로마 디자인그룹 (ROMA Design Group)의 디자인을 선정하게 된다. 디자인은 커다란 돌산에서 그 가운데 토막이 밀려나오는 모습을 하고 있고 이는 킹의 1963년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 중 “이 믿음으로, 우리는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베어 낼 수 있습니다.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hew out of the mountain of despair a stone of hope)”의 부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기념관 입구에는 실제로 “절망의 산(THE MOUNTAIN OF DESPAIR)”이라고 표현될 만한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있는데 가운데 부분이 잘려 밀려져 나간듯한 모습으로 양쪽으로 남은 두 덩어리 사이를 통해 기념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통로를 지나며 보게 되는 양 절단면의 표면에는 밀려져 나가며 긁힌 자국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과정에서 가진 어려움 등을 표현한다고 한다. 이 절망의 산을 지나 들어온 기념관 안쪽에는 절망의 산의 가운데 토막이 놓여 있는데 이것이 희망의 돌(A STONE OF HOPE)이다. 30피트 ( 9.1 미터) 높이의 거대한 돌 양쪽 표면에는 역시 긁힌 자국이 조각되어 있으며 앞쪽으로 마틴 루터 킹 입상이 고부조로 새겨져 있다. 한 손에 연설문을 쥐고 팔짱을 낀 그는 상당히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으며 앞쪽에 넓게 펼쳐진 타이달 베이슨을 바라보고 있다. 이 조각은 중국의 조각가인 레이 이신(Lei Yixin)이 제작하였으며 사실 150개의 화강암 덩어리를 합쳐 만들어졌다. 킹의 모습은 영상과 사진을 통해 본 그 모습과 매우 흡사하였고 커다란 돌 속에 그 몸의 일부가 묻힌듯한 모습은 순간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인 “노예 (혹은 죄수) “<Michelangelo, A Slave Called Atlas, 1520-30년경>를 연상케하였다. 미켈란젤로의 이 조각에서 돌덩어리 속 몸부림치는 듯 일부만 깎여 표현된 노예의 몸은 그 속박의 무게를 느끼게 하였는데 희망의 돌 속에 새겨진 마틴 루터 킹 자신도 아직은 벋어나지 못하였던 개선하고자 하는 그 상황에 갇혀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 아닐까 생각게한다.
기념관을 초승달 모양으로 둘러싼 450피트(140 미터) 길이의 검은 화강암 벽에는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과 설교 중 14개의 유명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절망의 산을 지나 들어온 기념관 안에서 우리는 그가 남긴 유산인 이 문구들을 읽으며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동양계 여성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2019년 나의 삶에는 50여 년 전 그들이 겪은 거대한 절망의 산은 있지 않았고 이는 이러한 역사 속 희생에 내 삶이 빚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부분은 있고 이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필요하다. 2011년 마틴루터킹 기념관 헌정식에서의 오바마 대통령의 기조 연설은 오늘 기념관을 방문하는 우리를 생각게 하고 긍정의 한 걸음을 다시 내딛게 한다. “우리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 나라를 위하여 큰 영향을 준 한 사람과 운동을 기억하는 이날, 이러한 과거의 어려움 속에서 힘을 끌어내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변화가 빠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변화는 단순하지 않으며 논쟁이 없지도 않습니다. 변화는 그 지속성에 달려 있습니다. 변화는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조각가의 눈으로 본 제2차 세계대전 기념관 (World War II Memorial)


워싱턴 모뉴먼트와 링컨 기념관을 연결하는 일직선 상에 위치하는 제2차 세계대전
기념관은 지난 2004년 완공되어 헌정되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1941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되고 1945년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종전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일본 패전의 날인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은 차후 분단으로 이어지는 아픔을 가지게 되지만 2차 세계대전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끼친 전쟁임에 틀림없다. 미국에게도 2차 세계대전은 600만 명이 참전하고 40만명이상이 전사한 커다란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전쟁이었으나 이 전쟁은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종식을 크게 도우며 미국경제 회복에 이바지하였기에 미국 역사에 있어 2차 세계대전은 반드시 슬픈 역사로만 기억되지 않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무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종전 후 거의 59년이 지난 2004년에서야 기념관을 건립한 것은 의외의 일이다. 이와같이 시기가 늦음을 사과하듯 2차 세계대전 기념관은 워싱턴 모뉴먼트와 링컨기념관을 연결하는 내셔널 몰에 어떠한 건축도 허락되지 않는 법을 깨고 리플랙팅 풀(Reflecting Pool) 동쪽 끝 쪽에 거대한 크기로 지어진다. 기념관의 입구에 있는 안내석(Announcement Stone)에는 이 기념관 위치의 정당성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 우리나라 18세기의 아버지인 워싱턴과 19세기의 보존자인 링컨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선조가 우리에게 맡긴 자유와 정의라는 선물을 지키기 위하여 2차 세계대전 중 고난을 감수하고 희생한 20세기의 미국인들을 기린다.
(HERE IN THE PRESENCE OF WASHINGTON AND LINCOLN, ONE THE EIGHTEENTH CENTURY FATHER AND THE OTHER THE NINETEENTH CENTURY PRESERVER OF OUR NATION, WE HONOR THOSE TWENTIETH CENTURY AMERICANS WHO TOOK UP THE STRUGGLE DURING THE SECOND WORLD WAR AND MADE THE SACRIFICES TO PERPETUATE THE GIFT OUR FOREFATHERS ENTRUSTED TO US: A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JUSTICE.)

기념관 디자인은 400여 건의 공보지원 작 중 프레드릭 플로리안(Fredrich St. Florian)의 작품이 1997년 선정되었다. 전체적으로 타원형의 디자인을 가진 기념관은 마치 공원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분수를 가진 무지개 연못(Rainbow Pool)을 가운데 두고 남과 북으로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이었던 대서양과 태평양을 상징하는 2개의 43피트(13m) 화강석 대형아치가 세워져 있다. 각 아치안에는 브론즈로 캐스팅된 참나무월계관을 네 마리의 독수리가 들어 올리고 있다. 이 두 아치를 중심으로 두 군데로 나뉘어 56개의 화강암 기둥이 둘러서 있는데 이는 전쟁 당시 미국의 48개 주와 관할 지역, 그리고 워싱턴 디시를 나타내고, 기둥마다 각 주의 이름과 함께 참나무잎과 밀로 엮인 브론즈로 캐스팅된 화환이 장식되어 있다. 여기서 참나무 잎은 군사력과 산업력을 상징하고 밀은 농업 생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기념관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자유의 벽( Freedom Wall). 벽에는 4,048개의 금색 별이 있으며, 각각의 별은 100명의 미국 전사자를 나타낸다. 벽 아래는 중앙의 분수와 같이 요란하지 않은 작은 연못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앞에는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대가를 표합니다.(HERE WE MARK THE PRICE OF FREEDOM)"라는 메시지가 새겨있다.

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참전국 간에 이해관계가 광범위하고 복잡하여 이를 어떻게 해석해 볼 수 있는지는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과도한 국가주의(Nationalism)를 가진 몇몇 국가가 그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고 이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희생을 낳았다는 것이다. 워싱턴 디시의 제 2차 세계대전 기념관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에게는 특별히 가슴을 울리는 전율이 없음이 고민되었다. 조각가의 위치에서 바라본 기념관은 장소적 위치가 기념관 안내석(Announcement Stone)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역사적 의미를 관통하는 공간이란 이유 외에 디자인과 조각 등에서 그 거대함에 비해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함이 안타깝다. 어쩌면 기념관에서 찾고자 했던 보편적 인류애보다 자국의 이해와 자긍심 속 또 다른 모습의 국가주의를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최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상식을 넘어서는 국가 간 상호협력 무역 관계의 일방적 단절 등이나 제재 등의 또 다른 국가주의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 접한다. 견제와 경쟁이 서로의 발전을 위해 긍정적일 수 있는 반면 국가간의 잘못된 이기심은 우리에게 2차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의 전철을 또다시 밟게 하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고귀하지만 가슴 저린 저 황금별이 우리의 미래에 더 이상 있으면 안되기에.

조각가의 눈으로 본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 (Vietnam Veterans Memorial)

브이(V) 하면 빅토리. 사진을 찍을 때 이가 가지런히 드러나는 모습을 위하여 우리는 종종 “치즈~ 김치~”등을 외치는데 이때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은 벌써 V를 만들고 있다. 사십을 넘으면서 의식적인 자제로 인하여 올라가려는 두 손가락을 꼬아 내리는 나는 여전히 단체 사진 속 곳곳에 등장하는 남의 V를 바라보며 ‘그래, 그곳에 네가 지금 있다는 것. 그것이 빅토리지(승리지)’를 되뇌며 흐믓해 한다.
워싱턴모뉴먼트에서 링컨기념관을 향해 걷다 보면 조용한 공원 속에 거대한 검정의 브이(V) 를 만날 수 있다. 대학원때 공공 미술 주제의 수업에서 지금은 철거된 미국 뉴욕 연방 광장에 설치되었던 리처드 세라 (Richard Serra)의 ‘기울어진 호(1981-1989)’와 비교하여 토론하였던 마야 린 (Maya Lin)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의 모습이다. 학생신분으로 대형 프로젝트였던 기념관 공모전에 당선된 마야 린의 작품인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은 여러 면에서 회자되었으나 실제로 방문한 기념관은 가장 미니멀하면서도 기념관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갖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긴 기간 동안 진행된 베트남 전쟁은 수많은 희생과 패전이라는 오욕을 미국에 안겨 주었고 미국인에게는 잊고 싶은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의 브이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참고하였을때 승리를 나타내는 브이(V)는 아닐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던 나는 베트남( Vietnam)과 베테랑 (Veteran)의 알파벳 첫 자 브이(V)를 생각하며 쉽게 기념관 전체의 미니멀적 형태에 관한 의구심을 잠시 내려놓았다.
베트남 전쟁의 퇴역군인이었던 얀 스크럭스( Jan Scruggs)를 중심으로 베트남전 참전자들은 미국 사회에서 그들의 공로 인식을 원하며 비영리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 펀드를 조성하게 되고 이를 위한 기념관설계를 공모하게 된다. 공모 시 조건은 기념관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주위의 다른 기념관과 조화를 이루며 전쟁희생자들의 이름을 담을 수 있고 전쟁에 관한 정치적 언급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조건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베트남 전쟁 참전자들의 문제와 정부 정책과의 분리함으로써 국가 화해의 중요한 과정을 시작하고자 하는 희망을 담았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공모 조건 아래1441개의 설계안이 들어왔고 이중 당시 예일대학교 건축학부에 재학중이던 21세의 마야 린( Maya Lin)의 설계가 당선되었다. 린의 설계는 겉모습은 매우 단순하였으나 명확한 의도와 의미를 담고 있었다. - 요약하자면 각 246.75피트( 약 75 미터)의 검정 화강암 벽이 125도 12분의 각도로 만나 세워지고 이 각 끝은 워싱턴 모뉴먼트와 링컨기념관을 향하고 있다. 공원 속에 또 다른 공원을 설계하고자 하며 거울처럼 연마된 검정 화강암의 표면은 주위의 환경을 반영할 것이고 이로 인해 기념관과 자연은 하나가 될 것이다. 참전용사58,267명의 이름은 전투가 벌어졌던 연대순으로 새겨질 것이며 이는 개별적인 인간 희생의 연속을 보여주고 이 이름들은 기념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명확한 전제조건 충전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 당선작임에도 불구하고 당선자의 개인적 배경 (중국계 미국인, 21세 여학생) 을 빗대 린의 설계는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기존 높게 지어진 기념관들과 달리 기념비가 영웅적이지 못하고 마치 패배를 상징하듯 땅속으로 기어들어가며, 수치와 슬픔의 상징인 검은색 대신 흰색의 돌을 사용해야 한다는 성차별적이며 인종차별적인 논란으로 당선취소를 요구하였다는 기록을 보게 된다. 이후 의회의 중재로 전통형식의 기념비를 따로 건립한다는 타협안을 갖게 되고 린의 검은벽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백인, 흑인, 히스패닉계 3인의 군인 동상과 여군 동상이 사족( 蛇足)과 같이 추가된다.
1982년 헌정된 기념관은 V자 형태의 중심을 향하여 약간 아래로 경사지게 되어 있었다. 마치 지난 비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땅속으로 살짝 들어가는 기분을 들게 하는데 이는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라 펼쳐진 기념관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느낌과 같았다. 동서 각 70개의 거대한 검정 화강암 패널은 각 패널 아랫부분에 1에서 70까지 번호가 적혀 있어 기념관 외곽에 배치된 참전용사 명부를 통해 쉽게 그 이름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시작 쪽 패널에는 한 줄로 시작된 병사의 이름이 0.53인치라는 작은크기의 글씨로 평균 5명의 이름이 빽빽히 새겨져 있다. 이 줄은 10.1피트 (3미터) 높이의 기념관의 가운데에 이르면 137줄이 된다. 각 이름 앞에는 다이아몬드나 십자가 형태가 새겨져 있는데 다이아몬드 형태는 전사자를 표시하고 십자가 형태는 포로가 되었거나 행방불명인 참전자를 표시한다. 또한 각 패널의 아래쪽에는 마치 작은 재단과 같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참전자의 가족이나 친구가 남긴 편지나 유품, 꽃등이 놓여 있었고 이는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치유의 과정으로서 준비된 공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배려의 한가지로 기념관에서는 각 참전자의 이름을 종이와 연필로 탁본을 뜰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종이와 연필은 등록에 의해 무료로 제공된다.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그 그리운 몸 대신 그 이름을 수없이 반복하여 문지르며 위로한다. 서서히 연필 선을 따라 드러나는 그리운 이름을 그대 대신 가슴에 꼭 품으며 돌아오는 가족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설계자였던 린의 의도처럼 새겨진 이름들은 각 개개인에서 피상적인 기념관의 역할이 아닌 만져지며 공유하는 기념관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마음을 스치는 단어들이 있다. The Value of Vulnerability. 약함의 가치. 공원의 대지 위에 박혀있는 듯한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은 누군가의 가슴에 박혀있는 전쟁의 아픈 파편과 흡사한 모습이 아닐까? 패전이라는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와 닮은 그 검소하고 낮은 모습은 승전의 영웅적인 면모를 자랑하는 높이 솟은 어느 기념관보다 진실함에 있어 가치있다. 이 약함을 고백하며 각 인간의 희생을 위로하는 장을 통해 전쟁이라는 비극을 돌아보며 이를 참회하며 용서와 화해를 이루는 장소는 미래의 우리에게 긍정적 가치를 만들어낼 테니까. 이 공간에 알맞은 브이의 의미를 찾은 것 같아 슬며시 오랜만에 내 검지 중지를 올려본다.

Lincoln Memorial: Seen through a Sculptor’s Eyes

2019년 7월 4일 워싱턴디시에서는 예년과 다른 독립기념일 기념행사가 있었다. 이는 링컨기념관 앞에서 이뤄진 트럼프 대통령이 계획한 ‘미국에 대한 경례 (Salute to America)’ 행사로, 행사에서는 대형 전차 전시를 비롯하여 에워포스 원, B-2 스텔스 폭격기와 블루엔젤 등의 막강한 미군의 기량을 과시하는 퍼레이드가 있었다. 수많은 비판과 함께 날씨마저 비가 오며 협조하지 않는 가운데에도 모든 행사는 꿋꿋이 진행되었고 나는 현장에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디시 하늘 아래서 크게 들리는 비행기들의 비행 소리만으로도 이 행사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진행되었던 미 해군 블루엔젤의 고공 쇼는 과히 상징적이었는데 행사가 있던 링컨 기념관으로부터 여섯대의 비행체들이 마치 폭죽이 터지듯 솟아오르는 모습은 수많은 보도진을 통해 이번 행사의 상징적 모습으로 기록되었다.

링컨기념관은 여러 역사적인 모임과 연설의 무대로 사용되어왔고 지금도 이처럼 사용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사적인 사건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I have a dream)” 연설이 1963년 기념관 전면 계단에서 행해졌고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같은 곳에서 취임 전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 공간은 지금도 자유와 평등 등의 기본적 시민들의 권리를 선언하며 요청하는 장소로 꾸준히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링컨기념관이 미국인들에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자유와 평등의 유산을 상기시켜줌과 함께 미래세대를 위한 영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링컨 기념관은 미국 제 16대 대통령이며 남북전쟁과 노예해방등의 업적을 가진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 1809-1865)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워싱턴 디시에 네셔널 몰 서쪽 끝에 위치한 기념관은 국회와 워싱턴 기념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건축가 헨리 베이컨 (Henry Bacon, 1866-1924)의 설계로 1922년 5월 30일 완성되었다.

그리스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기념관은 콜로라도 율 마블과 인디아나 라임스톤으로 지어졌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도리아식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기둥들은 링컨 대통령 사망 당시 연합의 36주를 상징하는 3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둥 위쪽 프리즈( frieze) 부분에 각 주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념관 헌정년인 1922 년에는 연합이 48개 주가 되어 이 위쪽 에틱( attic) 외벽에 48 개 주의 이름을 또한 새겼다고 한다.


계단을 올라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바로 좌상의 링컨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높이와 넓이가 각각 19피트 ( 5.8 미터)인 석상은 28 개의 거대한 대리석을 연결하여 제작되었다. 동상은 여러 자료를 통해 본 링컨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간 구불구불한 머리에 구레나룻 수염으로 감싼 직사각형의 날렵하면서도 각진 얼굴, 나비넥타이에 조끼와 긴외투를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한 링컨의 모습이다. 의자위에 걸쳐진 두 손은 한 손은 자연스럽게 얹혀 있었으나 주먹 쥔 왼손은 마치 굳건한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시선으로 약간 아래를 내려보듯 치겨 뜬 그의 눈은 마치 기념관 앞 광장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보는 듯 하면서도 저쪽 리플렉팅 풀을 넘어 보이는 국회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보게 한다. 상당히 현실감이 있어 보이는 이 링컨 동상은 1860 년 조각가 레오나르드 볼크( Leonard Volk)의 시카고 스튜디오에서 떠낸 링컨의 실제 라이프 마스크에 기반하였다고 한다.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Daniel Chester French, 1850-1831)가 이 마스크를 분석하고 사진등의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동상을 디자인하였고 뉴욕의 피치릴리 형제(Piccirilli Brothers)가 이를 4년에 걸쳐 조각하였다.

링컨 동상의 오른쪽 벽인 기념관의 북쪽벽에는 링컨 대통령이 두 번째로 취임한 1865년 3월 4일의 대통령 취임사 일부가 새겨져 있고, 링컨 동상 왼쪽 벽인 기념관의 남쪽벽에는 그의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 새겨져 있다. 특히 게티즈버그의 연설문에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운 민주주의 유명한 명언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가 적혀있다.

2개의 연설문 윗부분에는 마치 각 연설문을 상징하는 듯한 내용의 가로18미터 세로 3.6미터 의 긴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프랑스 화가 쥘 게랭(Jules Guerin)에 의해 제작되었다. 온도와 습도의 변화를 견딜 수 있도록 등유와 왁스 등이 포함된 특수 페인트로 제작되었고 두 벽화 모두 영원의 상징인 노송나무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에 천사가 등장한다. 북쪽벽의 천사는 화합을 상징하는 내용으로 남북을 나타내는 두 인물의 손을 합쳐주는 모습을 하고 있고 남쪽벽의 천사는 자유를 상징하는 내용으로 마치 비상하듯 양손을 위로하고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있는데 속박의 족쇄에서 노예를 풀어주는 듯한 천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념관의 지하에는 역시 링컨의 생애와 기념관의 현재까지의 역사가 자료실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기억해야 할 역사적인 내용의 보전과 함께 자유, 평등, 화합이라는 정신적 유산의 상기 공간으로 링컨 기념관은 그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의 모국인 한국에도 이러한 공간이 있었던가? 촛불 시위가 있었던 광화문광장이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안도한다. 민주주의 속에 귀한 역사적 유산을 상기하며 현재를 개선하기 위한 평화적 발언대가 되는 이런 공간이 있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위키피디아를 통해 찾아본 링컨기념관의 역사에 벌써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링컨 기념관에서의 행사가 기재되어 있다. 이것은 앞으로의 미국의 역사에 어떠한 의미로 평가될 것이며 이후 얼마나 많은 모임과 연설이 이곳 링컨기념관 앞에서 이뤄질 것인지 상상하며 이 모든 역사의 흐름이 우리의 보편의 가치를 만족시키며 상생의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해 본다.


The Thomas Jefferson Memorial: Seen through a Sculptor’s Eyes

“빵빵빵” 칠월 사일 저녁의 밤하늘에 크고 작은 불꽃들이 터진다. 메모리얼데이를 시작으로 미국에서는 수영장등의 야외시설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햄버거 핫도그등을 밖에서 굽고 친교하는 바베큐가 시작된다. 이는 7월 4 일 독립기념일을 맞이하여 최고조에 이르는데 낮에는 이웃과 함께 차가운 맥주와 햄버거등을 먹으며 보내다가 저녁이 되면 각자 준비한 조그만 불꽃놀이를 쏘아 보던지 동네에서 준비한 커다란 불꽃놀이를 지켜본다.

“아메리칸드림( American Dream)”이란 말을 사용하기에 이제 어색한 시대가 되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있으며 자유로운 삶이 보장된 살만한 나라이다. 1776년 7 월 4 일 미국 독립선언이 채택이 된 이후 길지 않은 240 여년의 미합중국 역사속에 이를 위한 어떤 역사적 노력의 발자취들이 있었는지가 궁금하였다. 이 역사는 워싱턴디시에 기념관들속에 잘 정리되어 있었고 독립선언문의 기초위원이며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1826) 기념관을 먼저 방문하여 보았다.

포토맥 강가의 인공호수인 타이달 베이슨( Tidal Basin)을 둘러싸고 많은 기념관들이 있고 이중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은 호수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축가 존 러셀 포프( John Russell Pope, 1874-1937) 가 디자인하고1943 년 헌정된 기념관은 제퍼슨 자신이 좋아하였다는 건축 양식인 로마의 판테온(Pantheon) 형식을 따라 열주와 돔 모양으로 지어져 있었다. 입구의 원형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자 거대한 브론즈의 제퍼슨 동상을 만날 수 있었는데 돔의 바로 아래 위치한 동상은 공간에 비하여 매우 크다는 느낌을 주며 서 있었다. 이 동상은 조각가 루덜프 이반스(Rudulph Evans,1878-1960) 에 의해19 피트( 5.8m) 의 높이에 10,000 파운드( 4336kg) 라는 거대한 크기로1947년 브론즈로 제작되었다. 1943 년 기념관 헌정 당시에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금속의 부족때문에 브론즈색으로 채색된 석고로 제작되었고 4년후 브론즈로 바꾸어 다시 세워졌다. 토마스 제퍼슨의 중년 시기의 모습을 재현하려 했다는 동상은 왼손에는 독립선언문을 쥐고 있으며 발 뒷꿈치 부분에는 담배잎과 옥수수의 작은조각들이 새겨져 있는데 제퍼슨이 농업을 중요하게 여겨 이에 이바지 한 부분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동상을 둘러싸고 있는 대리석의 사방 벽에는 제퍼슨의 연설과 독립선언문 의 일부가 적혀 있는데 특히 동상의 남서쪽벽에는 1776년 독립선언문의 일부가 발췌되어 적혀 있다. 인상적인 부분은 동상의 시선은 기념관의 앞쪽에 세워진 기둥들 너머로 타이달 베이슨 호수를 바라보고 있고 기념관이 백악관을 정면으로 마주한 위치에 있으며 호수가에는 미국의 역사를담은 메모리얼들이 둘러싸여 있음을 생각할때 이는 의미심장하다.

기념관의 지하에는 제퍼슨 자료실이 있고 한 인물의 기념관 답게 그의 뛰어난 업적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디 한 곳 부족함이 없는 듯한, 그야말로 시대의 엄친아 였던 그의 업적을 둘러 보던 중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하였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지어졌다. (All men are created equal)” 라고 독립선언문에 적은 그가 그의 삶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 그는 200명이 넘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고 심지어 도망친 노예를 찾는 광고를 낸 적도 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 옆에 적혀 있는 해석이 재미있다 - 그는 이런 광고를 냈지만 가혹한 대우와 처벌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러한 치부까지 적혀있는 자료의 솔직함이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바라보게 하며 나를 미소짓게 한다. 이 아이러니한 두 양면의 자료를 보며 제퍼슨 그 자신의 난감함을 상상해 본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수 많은 노예를 거닐며 살던 그가 인간의 동등한 가치를 말하며 겪었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와 갈등. 그러나 제퍼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역사를 향하여 “자유와 평등” 이라는 방아쇠를 당겼다.

돌아 오는 길에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을 멀리서 돌아 보았다. 홀로 서 있는 제퍼슨 동상은 본인이 좋아하였다는 그 전통의 기둥안에 외롭게 갇혀 있는 거인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둥사이로 홀로 먼 곳을 바라 보고 있는 이 위대한 거인의 시선은 비록 본인 자신의 삶에서 이루지 못했을 지라도 역사를 통해 이뤄질 그의 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의 시선이 향하는 그곳에는 “자유와 평등” 의 또 다른 역사인 링컨기념관 과 마틴 루터킹 주니어의 기념관등이 자리 잡고 있고, 그가 남긴 이 유산은 역사를 관통하며 지금도 진행중일테니.

조각가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관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검은 화강암 벽의 좌측상단에는 “자유는 대가가 있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라고 세겨져 있다. 여름을 앞두고 초록이 짙어지기 시작한 때 방문한 워싱턴 디시의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관 (Korean War Veterans Memorial)에는 간단한 이 글귀만이 세겨진 검은벽이 있었다. 이벽은 둥그런 기억의 연못 (Pool of Remembrance) 을 가로지르고 있었으며 그 연못에는 오리 한쌍이 마치 서정시처럼 떠 있었다.
요즘처럼 한반도와 주변국과의 관계가 민감한 이때 특별히 6.25 전쟁이 발발하였던 6월을 앞두고 수많은 기념관들이 가득한 워싱턴 디시에서 1995 년 완공된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관을 다시 한번 방문해 보는 것은 의미있다.
평온한 마음으로 다가간 기념관의 기억의 연못의 연못가에는 전쟁 중 사망, 부상, 실종, 포로 병사들의 명수라는 더이상 평온하지 못한 사실이 돌판에 새겨져 있다. 마치 구글 지도의 목표점을 보듯 기념관은 원과 삼각 꼭지의 만남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긴 삼각형의 구도를 가진 19명의 참전 용사들은 그 원의 한가운데 있는 성조기를 향하여 다가오고 있고 기억의 연못은 목표지점의 메아리와 같은 모습으로 위치해 있다.
19명의 참전용사는 67개국의 가장 많은 참전 지원국의 기네스 기록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 주는 듯 다양한 인종들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가까이 다가 갔을때는 실제인물보다 약간 큰 7피트 ( 약 2미터 )정도의 사이즈로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들게 제작되어 있었다. 육해공군으로 각종 병기를 들은 군인들은 모두 우비를 입고 있는데 이는 한국전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이 혹한과 비바람이었다는 참전용사들의 회고를 담았다. 이들은 일정한 횡대를 지으며 목표점을 향하고 있었다. 그 대열은 바닥에 석판과 키 작은 향나무로 구분되어 있어 마치 한국의 나지막한 산과 들을 지나가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하였는데 이는 한국의 논과 용수로를 표현했다고 한다.
이때쯤 다시 돌아가 보아야 할 것은 이 병사들이 향하고 있는 성조기의 기점 가까이 바닥에 새겨진 문구- “우리나라는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부름을 받고 나선 이 나라의 아들 딸들을 기린다. (OUR NATION HONORS/HER SONS AND DAUGHTERS/WHO ANSWERED THE CALL/TO DEFEND A COUNTRY/THEY NEVER KNEW/AND A PEOPLE/THEY NEVER MET/1950,KOREA 1953)’” 라는 짧은 글로 요약된 이 기념관의 의미, 읽는 순간 가슴이 꽉 조여온다.
병사들의 얼굴들은 진지하고 어쩌면 두려움과 긴장이 가득차 있는 듯 하다. 생전 들어 보지도 못했을 지도 모르는 한 나라에서 완전 무장을 한 채 비오는 산과 들을 걷고 있을 그들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음각으로 표현된 눈들에서는 깊고 어두운 그들의 마음을 보는 듯하고 소조작업의 흔적으로 헤라 자국 긁혀진 표면은 마치 숲속을 헤치며 긁힌 흔적을 보는 듯 하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주조되어 제작된 이 인물들은 작년 작고한 미국의 조각가 프랭크 게이로드 ( Frank Gaylord, 1925-2018)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그는 세계2차대전 참전자로 전시의 군인들의 모습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할 경험이 있었다.
이 참전용사 동상들 옆에는 잘 연마된 검정 화강석의 164피트 (약 50미터) 나 되는 긴 벽이 있는데 그 표면에는 저부조로 모래연마(Sand blasting) 된 이미지들이 새겨져 있다. 이벽은 루이 넬슨(Louis Nelson ,1936-)에 의해 제작되었고 2500장이상의 6.25전쟁 사진을 합성하여 제작하였다고 한다. 인상적인 것은 연마된 검정 화강석에는 이렇게 세겨진 아련하게 보이는 전쟁의 모습들 뿐만이 아니라 우비를 입고 산과 들을 헤매고 있는 참전용사19명의 모습이 함께 비쳐 있다. 또한 그 안에는 기념관을 참관하러 온 우리 방문자들의 모습이 마치 하나의 이미지처럼 반영되어 함께 있다. 이는 종전이 아닌 휴전 67년의 진행중인 우리의 역사를 마치 이 기념비속에서 보는 듯 하다.
올해는 워싱턴 디시의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관을 굳이 찾지 않더라고 이제는 우리 주위에 몇몇 남지 않은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기억하고 찾아 보는 것은 어떨까? 7피트 조각처럼 건장하고 압도하는 모습이 아닌 이제 노년의 작고 굽은 모습을 한 그들의 한국을 향한 마음은 그 무엇보다도 크고 우리로 부터 존경받을 만하기 때문이다.